청나라의 발상지이며 근거지가 되었던 만주와 한반도의 매장문화를 비교해 보는 것은 청나라와 조선의 문화를 비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림1]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매장문화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의 분포지역이다. 이것에 대해서 북한의 박진욱은 ‘비파형 단검은 형태가 비파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날이 비파처럼 생긴 것이라고 모두 비파형 단검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날의 형태가 비파모양으로 생겼을 뿐만 아니라, 검몸, 검자루, 검자루맞추개(가중기)를 따로 만들어서 조립하게 되어있는 단검이 바로 비파형 단검이다. 비파형 단검의 분포지역은 북쪽은 송화강 유역으로부터 남쪽은 조선반도의 남해안까지, 서쪽은 내몽골과의 경계선 부근으로부터 동쪽은 목단강 상류 유역까지이고 서남쪽은 소릉하 서쪽 즉 난하 유역까지다. 그 서쪽의 하북성에서 나온 것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할지라도, 검자루와 검몸이 붙어있는 주머니자루식 단검이나 비수식 단검은 비파형 단검에 포함시킬 수 없다. 주머니자루식 단검과 비수식 단검은 요서지방에서만 나왔으며 요동 및 한반도에서는 나온 예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 고조선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고, 고조선 문화의 대표적 유산인 고인돌과 비파형 단검의 분포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인 [그림2]와 대동소이하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물론 청나라의 기반이 되었던 만주 역시 [그림1]과 [그림2]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물론 만주를 기반으로 했던 청나라 역시 고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매장문화를 비롯한 영토문화는 물론 문화가 시간적으로 축적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청나라 역사가 중국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판가름 하는 것은 영토문제를 다루는 데에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존재하는 나라의 영토문제라면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청나라는 이미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춘 나라이기 때문에 그 역사의 귀속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 역사가 귀속되는 나라가 그 영토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가장 정통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금사·세기>에 의하면 ‘금의 시조 함보는 고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 외 여러 기록에도 금은 스스로 고려에서 나왔음을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오늘날의 중화민국을 건설한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신해혁명까지의 기조가 된 멸만흥한(滅滿興漢) 혹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이다. 만주족의 청나라를 멸하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다. 즉, 청나라가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을 지배하는 역사이니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중국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금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나라의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결국 청나라는 영토문화는 물론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대한민국과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