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토요일 오전마다 축구 수업을 받았다. 큰애 때도 그랬지만 주말 오전 산책하듯 함께 가서 운동장에서 뛰노는 것을 지켜보고, 오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행복 중의 하나였다. 축구선수가 되라는 바람보다는 아이가 잔디운동장에서 뛰어 놀 수 있다는 데에 의미를 뒀다. 한 시간 반 수업에서 첫 30분은 체조와 달리기이고 잠깐 쉬었다가 전후반 15분씩 편을 나눠 시합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몇몇 고학년 아이들도 함께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몇 주간 지켜본 결과 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매번 시합에서 덩치 작은 1학년 아이들(숫자는 한두 명이 많지만)팀이 이기는 것이었다.

10명 내외로 팀을 만들었는데, 1학년 팀은 여자 애도 섞여 있고 덩치 작은 꼬맹이들로만 구성된 반면 상대는 팀원 숫자는 한두 명 적더라도 고학년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처음엔 얼핏 봐도 전력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두 명 많아 봐야 꼬꼬마 1학년 애들이 뭘 할까 싶었다. 그런데 몇 주 동안 1학년의 승리가 이어졌다. 그것도 아슬아슬한 승부가 아니라 2대 0 아니면 3대 0과 같이 착실하게 점수를 모은 결과였다.

 

실력은 둘째다, 문제는 열정과 근면성실이다

쭉 지켜본 결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팀을 나누면, 큰 애들은 골대 앞에서 지시만 했다. ‘너는 골키퍼, 난 수비, 다른 애들은 공격해, 반칙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공격만 해’라는 식이었다.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어른처럼 말투가 되바라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말해놓고, 자기는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입으로는 계속 팀원들을 향해 모진 말을 내뱉었다.

“멍청하게 뭐하냐? 공이 오는데.”

상대팀은 올망졸망 덩치는 작아도 모두 공을 쫓아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면 공은 상대편 골대 안으로 흘러 들어가곤 했다. 고학년 아이는 다시 자기 팀원들을 다그쳤다. 그러다 또 한 골. 그렇게 승기를 뺏기고 나면 어느 틈엔가 그 아이는 친해 보이는 아이들 몇몇을 데리고 슬그머니 운동장 밖으로 나가서는 비아냥거렸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간에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들만 생각하기 쉽다. 많은 기업들이 기업 이미지나 평판은 외부로 드러난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고객들에게는 깍듯이 대하고 각종 이해관계자들도 챙기기 마련이다. 정부부처, 국회에서부터 국세청, 은행, 세무서를 비롯해 언론이나 NGO단체들뿐만 아니라 파워블로거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말 한 마디는 기업에 즉각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많은 기업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정작 내부 임직원들의 평판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망가지는 원인은 내부의 곪은 상처에 있다

대외적으로는 그럴싸한 미담이나 경영진의 소식이 잘 포장되어 알려진 회사들도 내부에서는 각종 불평불만이 쌓여 곪고 있는 곳이 많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외부 노출은 신경 쓰지만 내부는 애써 외면하려 든다는 것이다. 흔히 회사가 힘들어지거나 망하는 것은 적자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속으로 곪은 상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조직 내부 커뮤니케이션에서 제일 큰 문제는 ‘프리 라이더’로 대표되는 ‘썩은 사과’나 ‘깨진 유리창’ 같은 ‘또라이’들 때문이다. 이들이 조직을 갉아 먹는다. 썩은 사과 하나를 방치하면 그 사과 하나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과까지 썩게 되고, 종국에는 사과를 담고 있는 상자까지 못쓰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정작 썩은 사과는 자기가 썩은 사과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도 할 뿐더러 인정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라이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이야기된다. 어느 조직이나 전체적인 또라이 수준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완전 또라이일 경우도 있고, 여러 가벼운 또라이들이 있는 경우도 있다. 군대에서 누구나 또라이 같은 왕고참만 제대하면 편해질 듯 보이지만, 그가 제대하고 나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새로운 또라이로 등장해 그 자리를 메운다. 이들 또라이들은 내부 평판을 저해하고 조직력을 갉아 먹으며 사기 저하와 함께 열정의 불꽃을 꺼트린다.

예전에 필자의 회사가 힘들었을 때 경영진에서 긴급 처방한 조치가 있었다. 매 분기마다 실적을 직원들에게 공유하자는 것이었는데, 발표할 내용과 인사말 같은 내용을 커뮤니케이션 파트에서 준비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함께 헤쳐나가자는 취지여서 허심탄회하게 준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의 검토과정을 거치면서 자료는 반대로 바뀌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하자는 의도는 사라지고 포장된 실적과 외부 뉴스와 경영진들의 업적이 드러나도록 분칠이 더해졌다.

강당 맨 뒤에 앉아서 발표 내용을 듣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임직원들은 반발감만 커져갔고 사내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 분명 발표에서는 실적이 나아지고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끼리 모이면, ‘다음 달에 월급을 받을 수나 있을까?’하는 걱정을 했다. 또 그 전까지만 해도 사석에서는 회사 걱정을 털어놓던 사람들도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분기발표는 이어졌다. 갈수록 내용은 화려해졌다. 파워포인트의 각종 툴과 그래픽을 장착한 프레젠테이션의 향연이 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실질적인 매출과 영업이익 폭은 줄어들고 당기순손실은 쌓여만 갔다.

 

얻어걸린 성공이 실패보다 더 무섭다

인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인재(人材), 인재(人災), 인재(人在). 人材는 말 그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준비된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人災는 실수나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회사에 크게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반면에 人在는 그냥 회사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뭔가 나서서 일을 하는 법도 없고, 시키는 일만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흔히 人材는 회사에 도움이 되지만, 人災는 회사에 손실만 끼치고, 人在는 크게 도움 되지는 않지만 반대로 손해를 입히지도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많은 조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지부동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서 묻어가는 것이다.

조직이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실패해 보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실패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성공에 이르고자 발버둥친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쩌다 얻어걸린 성공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어걸린 성공은 그 피해가 극명하다.

잘나가던 수많은 조직들이 망가지고 없어진 이유는 실패에서 기인한 것보다 성공에 도취된 이유가 더 크다. 그리고 다음번에도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도전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때문에 사실 최선을 다한 실패는 기업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며, ‘실패는 다음으로 기회를 이어주는 연장선’이다.

이런 관점에서 人材와 人災는 방향만 제대로 설정해 준다면 존재 가치를 보일 만한 사람들이 되겠지만,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수많은 人在들이 가장 큰 골칫거리다. 이들이 바로 조직의 암적 존재라 할 수 있는데, ‘또라이 총량 보존 법칙’에 의하면 웬만한 조직들이 늘 일정한 또라이 총량을 보유하듯, 이런 人在들도 늘 있다. 다만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조직에서 암적인 덩어리인 또라이나 人在들은 뭔가 시도하고자 하는 의견을 내거나 나서지 않는다. 반면에 누군가가 내놓은 의견에 대해서는 흠집을 내거나 반대를 일삼는다. 반대를 위한 시점에서만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 뭔가 필요한 시점에서는 철저히 복지부동으로 일관한다. 그들은 반대하는 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어설픈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늑대와 같은 눈빛으로 사정없이 그 아이디어를 절벽으로 밀어붙이며 위로부터의 신뢰를 얻는다. 그렇게 프로젝트 초기에는 의심만 일삼다가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거나 다 되어 갈 때쯤 슬며시 숟가락을 얹는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제일 경계 대상

또 다른 재미있는 사례는 상사를 4가지로 분류하는 것인데, 똑부, 똑게, 멍부 그리고 멍게가 있다. 똑부는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한 스타일이고, 똑게는 똑똑하지만 좀 게으른 상사, 반면 멍부는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을 일컫고, 멍게는 멍청하면서도 게으른 사람이다. 사실 이 4가지 분류에 전형적으로 들어맞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이 네 가지 분류는 그동안 수많은 직장인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직장 상사 분류법이다.

직장인들이 상사로 모시기 가장 좋아하는 부류는 똑게다. 똑똑하며 게으르다는 말보다는 똑똑하기 때문에 일에 쫓기지 않는다. 휘하의 직원들에게 엉뚱한 지시를 반복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리더라 일의 성과도 잘 나오기 때문에 휘하의 팀원들이 업무상 스트레스를 크게 받을 일이 없다. 4가지 분류 중에서 베스트 케이스다.

똑부는 똑똑해서 일을 잘 처리하고도 부지런해서 항상 새로운 일을 벌이는 리더 스타일이다. 일의 처리나 성과는 가장 많겠지만 팀원들은 업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똑똑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이해가 빠르고 잘 실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보기엔 별일 아닌 듯해도 웬만한 사람은 이해조차 힘든 일이 많다. 팀원들은 똑똑한 리더의 생각을 좇기도 벅차다.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한 리더의 휘하에 있으면 고생문에 들어섰다고 보면 된다.

반면 멍부로 가면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리더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힘들게 산을 올랐는데, ‘이 산이 아닌가 봐!’ 하는 일들이 펼쳐진다. 일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다그치는 스타일이다.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서 한 일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경우가 많다. 재작업을 해야 하고 지름길을 놔두고 고생길로 둘러간다. 이런 리더는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까지 남는다. 자기를 보지 못하고, 팀원들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간섭만 늘어난다. 하는 것에 비해 성과도 미미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멍게 스타일은 멍청한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서 일에 대한 감도 없기 때문에 팀원들을 닦달하지도 못한다. 애당초 길을 모르기 때문에 가고도 제대로 갔는지 모른다. 팀원들도 리더에 대한 신뢰가 없고 리더가 나서서 챙겨 나가지도 못하기에 오합지졸이 된다.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멍부가 멍청한 판단으로 팀원들을 고생시키는 것에 비하면 멍게 휘하에서는 많은 수고로움은 없다.

 

人材, 人災 되고 人在 되기도 하는 서글픈 현실

人材가 언제든지 人災가 될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人在가 되기도 한다. 주위를 보더라도 입사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조직 내에서 촉망받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발군의 실력을 보이다가, 본의 아니게 낙인이 찍힌 나머지 그 뒤로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시키는 일만 조용히 하는 사람들이 된다.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커뮤니케이션 문제에서 비롯된다. 군대에서 초임 장교들이 낯선 야외 훈련을 할 때는 부하들이긴 하지만 상병 병장들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에 기댄다. 똑똑한 리더와 멍청한 리더의 차이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된다. ‘어’라고 이야기해놓고는 ‘아’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나 조직이나 남의 몸에 있는 티끌은 잘도 찾아내면서 자기의 조직과 몸에 박혀 있는 들보는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 또라이라는 염증이 많아지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혈액이 순환하지 못한다. 커뮤니케이션 순환이 또라이라는 염증을 만나 역행하는 일도 발생한다. 전등갓처럼 불빛 아래로는 잘 보이지만 전등갓 위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내부 직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기술이 필요하다. 기업 문화가 토대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칫 대화가 주제를 벗어나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자기가 오너라는 생각에 ‘그래 한번 들어나 볼 테니 해봐’라는 식으로 임한다면 그건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직원들의 요구는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식비가 적다,’ ‘회식비를 올려달라’거나 ‘내년 연봉 인상률은 현실적으로 반영해 달라’는 식으로 어떻게 보면 자기들의 실익과 관련된 것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다가 거시적 시각에서 훈계하거나 일방적인 의사전달만 하는 경우 조직 커뮤니케이션은 막판에 이른다.

외부에 기업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보다 내부 임직원이 가지고 있는 회사 평판이 더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기업일수록 외부도 신경을 쓰지만 그보다 내부 임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에 힘을 더 쏟는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이다. 억지로 포장하고 강요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화를 자초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