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심유경이 조선에 오기 보름 전에 먼저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요동병사 5천을 거느리고 조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내정을 살피러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 밖에 이르러 보통문으로 쳐들어갔으나 성안이 고요하여 명나라 군사들이 의심을 하며 대동관까지 쳐들어갔을 때 길 좌우 방벽 사이로 조총탄환이 쏟아지니, 시가전의 기술이 부족한 조승훈은 일본군의 계교에 빠진 줄 알고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선봉 사유(史儒)가 적탄을 맞고 낙마하여 전사하자 조승훈은 남은 군사를 거두어 곧 요동으로 패하여 돌아간 뒤였습니다.”

“음!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심유경이란 자가 배짱하나로 조선의 왕을 만날 때 마치 친구나 대하듯이 거만하고 무례하였고, 영상 이하로 조선의 대신을 대할 때는 마치 자기의 수하사람을 대하는 것 같이 오만하였다. 그는 상국 대신의 위세와 존경을 내세우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적병을 물리려 하시오?’

하고 물으면 그는 유쾌한 듯이 가슴을 가리키며 흉중에 계책이 있으니 너희는 알바 아니다 라는 모습으로 대하였다.”

“네, 나라가 위급존망에 이르니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이 조선을 우습게 알고 있습니다. 심유경은 순안 땅에 이르러 평양에 있는 고니시에게 글을 보냈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대명 천자의 성지로 너희 무리들을 꾸짖어 묻노니 조선이 일본에 잘못한 바가 없는데 일본이 어찌하여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보냈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심유경은 이 글을 자기가 데리고 온 중국인에게 줘서 평양 보통문으로 들어가라 하니, 당시에 일본군은 길가는 사람도 사정없이 잡아 죽이던 시절이어서 이를 위태하게 여기는 것을 본 심유경은 웃으며

‘상관없다! 어느 놈이 내 서신을 가지고 가는 하인을 건드릴까 보냐?’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음! 겁 없는 놈이다. 난세에 저런 자가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고니시는 심유경의 서신을 보고 곧 만나기를 허락한 속마음은 한산도전투의 대패를 듣고 중국과 싸울 뜻이 없어서 핑계만 있다면, 또 히데요시의 마음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화친할 생각이 간절하던 때에 심유경의 서신을 반갑게 받았던 것이다.”

“네, 심유경은 고니시의 회답을 받고 부리는 하인 3, 4명만 데리고 태연하게 평양성을 향하였고, 고니시는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 승려 현소(玄蘇=겐소) 등을 데리고 평양성 북쪽 10리쯤 나와 맞이하였습니다. 만장(輓章=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을 바단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 행상行喪할 때에 상여 뒤에 들고 따름)과 같은 오색 깃발을 날리고 군사들은 창과 칼을 들고 찬란하고 위엄스럽게 꾸민 것이 실로 장관이었고, 심유경이 말에서 내리니 일본 군사가 에워싸는 것이 마치 그의 일행을 꼭 붙잡는 것과 같았습니다.”

“음! 그러자 고니시는

‘대인께서 서슬이 칼날 속에 계시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일본 사람일지라도 더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는 글을 써보였다. 이것을 보고 심유경은 더욱 자만심이 생겨서 하는 말이

‘너희는 당나라 곽영공(郭令公=당나라의 유명한 장수 郭子儀697-781년 당 현종 때 안사의 난755-763년을 평정하기도 하였다.)이란 분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홀로 말을 타고 회흘(回紇=위구르의 음역어, 몽골 고원에서 일어나 뒤에 투르키스탄 지방으로 이주한 터키계 유목민족)의 10만 군진 속에 들어가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너희들을 두려워하리오.’

라고 말하고 심유경은 자기가 대명 황제께 여쭈어 처분이 있을 것이니 한 50일만 기다리되 일본군은 평양성 10리 밖에 나와 약탈을 하지 말고 조선도 10리 이내에 들어가 싸우지 않기로 하여 오늘날 정전협정 같은 것을 맺었다.”

“네, 한편 조정대신들 중에는 심유경의 하는 일이 황당하여 의심을 했으며 특히 유성룡은 이 믿을 수 없는 작자가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하여 선조에게 그의 말을 믿지 말고 경계하기를 주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