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을 준비하던 중 스텝이 꼬이는 바람에(?) 꽤 오랫동안 취업준비생 겸 백수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손 벌리기는 싫고 돈은 벌어야 겠고 모아둔 것은 없고...고민을 거듭하며 너구리 라면의 미역만 씹어먹으며 살던 중 자취방 인근의 재래시장 야간경비 일을 하다가 우연히 방송 보조출연자(엑스트라) 일을 제안 받았습니다.

절실함 반, 호기심 반으로 경험한 보조출연자 일에 대해 여기서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딱 이것만 말하겠습니다. '보조출연자 분들의 업무 강도로 다른 일을 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 같다' 아, 이것도 있네요. '강원도에서 올라왔다는 이유로 나보고 감자로 일당 받으라는 농담을 한 반장, 제발 길 가다 우연히 한 번 마주치기라도 해봐라'

 

최근 배우 이승기의 복귀작으로 관심이 높은 CJ E&M의 tvN 주말드라마 화유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참신한 소재에 지상파의 전유물이던 주말드라마를 표방한 화유기는 방영 전부터 장안의 화제였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화제가 된 분위기입니다.

논란은 크게 두 가지, 최악의 방송사고와 부상 사건입니다. 먼저 최악의 방송사고. 2회 방영분에는 그린스크린을 화면에 그대로 보여주거나 허공에 매달린 보조출연자의 와이어 끈이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정상적인 프로세스라면 후반작업을 통해 특수효과를 적용해야 했으나 생방송 수준으로 촬영을 하고 편집을 시도하다가 사달이 난 겁니다. 복수의 관계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독의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국내 방송 제작 환경의 고질적인 적폐라는 말도 나옵니다.

제가 특히 관심을 둔 논란은 '부상 사건'입니다. 지난 23일 화유기 촬영현장에서 세트 작업을 하던 A씨가 무리한 업무 지시를 이행하다가 다쳐 허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고 하반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A씨는 MBC 아트 소속이며 화유기 촬영현장에서는 일종의 용역 개념으로 일했다는 후문입니다. 최악의 방송사고가 일어난 이유가 열악한 제작환경이며, 열악한 제작환경이 부상 사건의 결정적 트리거(방아쇠)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두 개의 논란은 같은 내용일 수 있겠네요.

당장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나섰습니다. 언론노조는 27일 '방통위와 관계 당국은 tvN 화유기 미술 노동자 추락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명확히 규명하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이철호 미술감독이 사고를 당한 직원(A씨)에게 요구했던 샹들리에 설치는 MBC 아트와의 용역 계약에 포함되지도 않은 일이었다"면서 "당사자가 야간작업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 다음날 설치하겠다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설치를 강요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다"고 분노했습니다.

또 "고용노동부는 즉시 CJ E&M과 JS픽쳐스에 드라마 제작 중지를 명령하라"고 강조했으며 "방통위는 관계당국과 조속히 협의하여 CJ E&M과 JS픽쳐스의 근로환경과 안전대책 수립 현황을 즉시 조사하라"고 말했습니다.

▲ 출처=화유기 홈페이지

맞습니다. 전 이번 사태를 보며 십 수년전 제가 보조출연자 일을 하며 겪었던 '현장의 적폐'가 '아직도 여전하구나'는 생각이 앞섭니다. CJ E&M의 대응에는 한숨만 나옵니다. '혼술남녀'의 조연출 이한빛 PD가 보조출연자 등을 압박하는 자신의 업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불과 5개월 전입니다. 당시 CJ E&M은 현장 인력의 적정 근로 시간, 휴식시간 등 포괄적 원칙 수립과 스탭 인력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책임CP 명함 배포를 통한 핫라인 구축 등을 약속했으나 모두 공염불이었다는 것이 이번 사고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특히 CJ E&M이 논란의 중심에 선 대목이 더 속상합니다. CJ E&M은 케이블 방송사며, PP(프로그램 프로바이더) 중 가장 두각을 보이고 있는 콘텐츠 제작자입니다. 지상파 중심의 콘텐츠 제작 생태계를 넘어 케이블을 통한 미디어 다양성 확보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CJ E&M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더 아이러니한 지점은, 그 누구도 아닌 CJ E&M이 미디어의 미래에 대해 가장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CJ E&M은 레거시 미디어 중 유일하게 1인 크리에이터 중심의 MCN(멀티채널네트워크)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다이아 TV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MCN 업계의 고민 중 하나인 수익구조 확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나, MCN 업계의 큰 형이 바로 CJ E&M입니다. 레거시 미디어 중 미디어의 미래를 가장 빠르게 감지하고 움직였던 이들이, 비록 사업 섹터는 다르지만 동일한 사명 아래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난 7월 열악한 지원속에서 아프리카 촬영을 강행하던 중 숨진 故 박환성, 김광일 독립PD 사건을 계기로 현재 방송가에 나름의 '성찰'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MBC 사장으로 부임한 최승호 사장도 외부인력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며, 방통위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부처는 지난 19일 외주 인력 관리에 소홀한 방송사를 대상으로 재승인 정국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합동 대책안을 발표했습니다. 늦었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CJ E&M은 더 큰 반성을 해야 합니다. 미디어의 미래를 말했기 때문에, 최소한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논했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 대한 반성의 감정은 더욱 생생하고 진심이어야 합니다. CJ E&M이 꿈꾸는 미디어의 미래가 여전히 낮은 쪽의 희생을 전제한다면, 혁명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제2의, 제3의 화유기 사태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