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구형 아이폰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이라고 답했다. 고객에게 최상의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지만 이번 사태가 제국의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사실이다. 단순히 기능이 불편하거나 AS가 어렵다는 것 이상의 문제로 여겨진다. iOS 생태계로 대표되는 애플의 사용자 경험 근간을 애플 스스로 부정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 자료사진. 출처=픽사베이

사용자 경험, 무너지다
애플은 왜 특별한 회사가 됐을까? IT매체 폰컬렉스는 아이폰 10주년 특집을 통해 “특별한 사용자 경험”이라고 단언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노키아보다 출시가 늦었고, 미니멀라이즘에 입각한 디자인도 애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폰컬렉스는 “아이폰이라는 단말기에는 iOS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탑재되어 특별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며, 스티브 잡스에서 시작된 혁신의 스토리 텔링이 담겨있다”면서 “애플 팬덤은 아이폰, 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애플 그 자체를 신봉한다”고 말했다.

애플 제국의 위대함도 여기에서 나온다. 단순히 기능적 우위가 아닌 애플이 제공하는 특별한 사용자 경험에 고객의 감성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 경험이다. ‘특별한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플의 사용자 경험은 100% iOS 생태계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애플이 구형 아이폰 속도를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애플 위기론’과 차원이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애플은 20일(현지시간) 공식성명을 통해 “우리의 목표는 고객에게 최상의 사용자 경험을 주는 것”이라면서도 “종합적인 성능과 함께 최대한의 기기 수명 보장을 위해 속도를 조절했다”고 주장했다. 구형 아이폰 단말기가 갑자기 종료되는 상태를 막기 위해 애플은 iOS 11.2 업데이트를 단행했으며, 전력 사용량이 줄어들도록 유도해 ‘갑자기 꺼지는 사태’는 막았으나 필연적으로 속도가 줄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애플의 공식성명은 구형 단말기의 속도 저하라는 사실은 설명할 수 있지만, 속도가 떨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 사용량을 줄여 더 큰 위기(단말기가 갑자기 꺼지는 사태)를 막았다는 논리에 이르면서 허점이 생긴다.

▲ 아이폰8 배터리 스웰링 현상. 출처=픽사베이

크게 두 가지 측면이다. 만약 더 큰 위기를 막기위해 구형 아이폰의 속도를 조절하려고 했다면 고객과의 충분한 소통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사용자 경험을 위한다면서 태연하게 ‘속도 저하 사용자 경험’을 용인했다는 것이 문제다. 기회비용을 따진 선택의 문제지만 사용자 경험의 애플이 너무 안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IT매체 더버지는 “애플 메시징의 실패”라고 단정하며 “배터리 수명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면 이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애플은 사용자 경험으로 제국을 건설했으며, 또 유지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폰8 스웰링게이트, 디스플레이 녹색 왜곡 현상 등 일부 기기를 둘러싼 논란과 이번 속도 저하 논란은 무게감부터 다르다는 평가다. 애플 스스로 고객의 사용자 경험을 저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통신업계의 망 중립성과 빗대어 “애플이 고객들을 대상으로 자체 제로레이팅을 시도했다”는 비야냥도 나온다.

▲ 아이폰X. 출처=애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해진다
애플은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이다. 여전히 높은 매출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가 19일(현지시간) 포천 500대 회사를 중심으로 초당 얼마나 많은 매출을 거뒀지 분석한 결과 애플은 1초에 1445달러를 버는 것으로 확인됐다. 2위인 금융기업 JP 모건 체이스가 782달러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익이다. 지난해 대한민국 1인당 GDP는 2만9730달러며, 이는 애플이 20초 동안 버는 액수와 비슷하다.

애플의 기술력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리의 기술 고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인공지능 스피커 홈팟도 베일을 벗었다. 18일(현지시간) IT매체 기즈모도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속삭이는 목소리’도 정확하게 시리로 파악할 수 있는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내년에는 에어팟2 출시도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iOS 생태계는 나날이 성공하고 있으며 아이폰 의존도도 크게 낮아졌다. 조만간 iOS용 앱도 맥 운영체제로 통합된다.

그러나 위기론도 만만치않다. 미국의 경제전문매체 CNBC는 19일(현지시간) 노무라인스티넷의 제프리 크발 애널리스트의 발언을 인용해 애플 위기론을 보도했다. 아이폰X가 출시되며 아이폰 교체주기가 찾아왔지만 예전과 비교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제프리 크발 애널리스트는 “현재의 애플은 3년 전 애플이 아니다”라면서 “콘텐츠 사업이 성장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혁신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낮췄다.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도 마찬가지다. 아마존이 최근 인공지능 스피커 에코의 가격을 크게 낮추는 한편 구글도 구글홈의 가격을 무려 40%나 내리는 등 치킨게임이 벌어지는 가운데, 후발주자인 홈팟의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다. 당장 스마트 스피커가 보급되어야 기본적인 인공지능 생태계가 구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태계 전략에 심각한 경고등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폰 시장 전망도 밝지않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시장 장악력이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3위 사업자인 중국 화웨이의 반격이 매섭다. 리처드 유 화웨이 CEO가 18일(현지시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스마트폰 시장 진출을 선언하는 등 전방위 공세에 나선 가운데 2위 사업자 애플의 지위도 크게 흔들릴 것으로 예상된다. 화웨이는 미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공공기관의 기밀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퇴출됐으나, 이번에 다시 재진출을 선언하며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의 ‘성지’를 장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애플은 4670만대의 아이폰을 팔아 점유율 11.7%를 기록했다. 전년 분기와 비교하면 약 0.3%p 줄어든 수치다. 반면 화웨이는 올해 3분기 3910만대를 판매하며 점유율 9.8%로 애플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전년 대비 점유율은 1%p 증가하는 등 성장세가 만만치 않다. 올해 4분기 화웨이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을 누르고 점유율 2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폰아레나는 지난해 분석가 오펜하이머 등의 멘트를 인용해 향후 10년간 아이폰 판매가 침체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7년 총 2억4500만대의 아이폰을 팔겠지만 그 이후로는 성장 동력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2017년이 지나면 사용자들이 고가의 아이폰에서 이탈해 새로운 단말기를 찾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애플이 더 이상 ‘혁신의 대명사’가 아니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최근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의 트렌드는 두 개 이상의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투톱 라인업과 디스플레이 면적을 넓히는 패블릿 스타일이다. 또 극단적인 베젤리스를 통해 전면 디자인의 혁신을 이루면서 인공지능 기술력을 담아내는 것에 있다. 애플은 투톱 라인업, 패블릿 기조, 극단적인 베젤리스에서는 삼성전자의 방식을 답습했고 인공지능 시리는 아직도 ‘최악의 인공지능’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애플카 컨셉 이미지. 출처=갈무리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의지도, 노력도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증강현실과 자율주행차를 비롯해 콘텐츠 중심의 사업구도재편을 시도하고 있으나 예전처럼 파괴적인 플랫폼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앤드루 우어퀴츠 애널리스트는 "애플은 차세대 혁신을 주도할 용기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