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5위인 해리 왕자가 미국 여배우인 메건 마크리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영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이 들썩이고 있다.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왕자와 외국인 여배우의 결혼이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관심의 초점은 예비 신부인 메건 마크리에 쏠리고 있다.

메건 마크리는 미국의 TV 시리즈 <수츠>(Suits)에 출연했던 배우지만 미국인들이 이름만 듣고 바로 누군지 알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뒤늦게 해리 왕자와의 결혼으로 그녀의 이력이 언론에 의해 알려지면서 이런저런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영국 왕자가 외국인인 미국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도 새롭지만 메건 마크리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려졌다. 불과 80여년 전에는 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려야 했을 정도로 엄격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가장 세간의 관심을 끈 부분은 메건 마크리가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라는 점이다. 메건 마크리의 아버지는 영국계 백인이고 어머니는 흑인인데, 메건 마크리의 외모가 흑인보다는 백인에 가까워서 이런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영국 왕실 1300년 역사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이 왕실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메건 마크리는 그러나 본인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TV나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으며,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양쪽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은 혼혈이라고 강조했다.

메건는 본인이 당당히 자신이 혼혈이라고 밝혔지만 백인이 아직도 우대받는 미국의 현실 때문에 종종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백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화이트 패싱(White Passing)으로 불리는 이런 현상은 미국 내 만연한 인종 차별과 피부색으로 인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굳이 본인의 인종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외관상 딱히 차이점이 없는 흰 피부의 혼혈인들이 이에 해당한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정의되는 것이 한 방울 원칙(One drop Rule)이다. 이 원칙이 강력한 탓에 사실상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혼혈인들이 어정쩡하게 한편을 선택해야 하는 과정에서, 흑인을 선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백인을 선택하면 화이트 패싱이라고 불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 유명했던 사람들도 사망 이후에 흑인임이 드러나 화이트 패싱으로 살았던 것이 폭로되기도 했다. 작가 아나톨 브로야드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 ‘흑인 작가’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뉴욕과 코네티컷에서 작가로 활동하던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백인으로 지냈으며 유럽계의 백인 아내와 결혼해서 자녀를 뒀다. 아나톨 브로야드의 딸은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야 아버지가 백인으로 살아온 혼혈임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던 영화배우 멜 오베론은 유럽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평생 자신을 호주에서 태어난 백인이라고 소개하고,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엄마를 하인으로 속이기도 했다. 멜 오베론이 사망한 후에야 출생지와 부모, 혼혈 등의 정보가 공개됐다.

화이트 패싱은 많은 문학작품과 TV, 영화의 소재로도 다뤄졌는데 <슬픔은 그대 가슴에>(Imitation of Life)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소개됐던 1934년 영화에서는 하얀색 피부로 백인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이 자신을 백인으로 간주하면서 흑인인 엄마를 부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백인으로 행동하는 역할을 맡은 영화배우는 실제로 혼혈이었으며 영화와는 달리 본인을 흑인으로 소개했다.

한국에서는 ‘석호필’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알려진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인 웬트워스 밀러의 첫 작품 역시 흑인이지만 백인으로 살아가는 역할이었으며 실제 웬트워스 밀러도 백인과 흑인 부모를 둔 혼혈이다.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배경의 선조들을 둔 현대 미국인들에게 본인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혹은 동양인인지 한 단어로 규정을 하라는 것이 어쩌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발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