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싱가포르 방송장비박람회(BCA) 현장. 글로벌 방송장비 업체들이 자신들의 기술력과 솔루션을 자랑하는 자리에 국가별 스타트업 전용관이 문을 열었다. 그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전용관은 바로 독일관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화려한 미사어구를 동원해 자국의 기술력을 자랑했으나 독일은 전용관 입구에 딱 한 문장만 아로새겼다. 바로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여기서 어떤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 밀레의 스마트 냉장고. 출처=밀레

유럽 시장 장악한 장인정신
영국의 시장조사업체 유로 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유럽 가전시장 판매 점유율 1위는 10.5%의 삼성전자다. 가전의 왕자인 TV만 봐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강세가 강하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8월 기준 2500달러 이상 유럽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점유율 36%를 차지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일부 지표로 국내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제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방을 중심으로 라인업을 갖추는 빌트인 분야에서 유럽 토종 플레이어들의 강세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TV와 세탁기, 냉장고 등을 따로 구입하는 문화에 익숙한 국내와 달리 유럽과 미국의 가정은 프리미엄 빌트인 라인업으로 자신의 집을 채우는 경향이 짙다. 미국과 유럽의 프리미엄 빌트인 시장 규모는 총 50조원 규모며 미국이 11조원인 반면 유럽은 24조원에 이른다.

유럽 가전시장의 핵심인 빌트인, 특히 주방 가전기기를 놓고 보면 유럽 토종기업의 강세가 상당하다. 밀레와 보쉬, 음향의 젠하이저와 독일의 블롬베르크, 필립스 등 기라성같은 유럽 기업들이 대부분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 가전시장이 항상 순항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일본 가전기업의 성장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일본 소니의 경우 유럽 시장에서 '프리미엄 시프트' 전략을 일찌감치 가동하며 TV와 스마트폰, 특히 AV 분야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일본 가전업계가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왕좌를 내어주며 몰락하자 유럽 가전시장은 빠르게 내적 생태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 일본 가전업계가 부활하며 유럽 안마당을 두고 토종 업체와 일본 전자거인들이 다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총괄하는 소니 영국 법인은 2014년 흑자에 성공했으며 2015년 유럽 TV 시장 철수를 선언했던 샤프도 대만 폭스콘에 인수된 후 2018년 다시 유럽 TV 시장에 돌아온다고 발표했다. 유럽 가전시장을 큰 틀에서 보면 개별 가전시장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석권하고 있으나 주력은 빌트인 시장에서는 유럽 토종업계가 오랜기간 우위를 점하고 있고, '돌아온 메이드 인 제팬'이 재차 도전장을 내미는 형국이다.

여기서 유럽 가전업계는 안방을 수성할 수 있었던 전략을 글로벌 시장 공략으로 적극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인들은 빌트인으로 자신의 집을 하나의 색으로 채우고 있으며, 당연히 오랜기간 기술력을 인정받은 익숙한 토종업체를 선호한다"며 "빌트인이 곧 프리미엄 시장이기 때문에, 향후 유럽 시장을 두고 한국과 일본까지 참전하는 삼자대결 구도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 2015년 밀레 코리아 10주년 기자회견. 출처=밀레 코리아

밖으로 뛰쳐나오다
유럽 가전업체들은 최근 유럽 내 시장의 점유율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벌 진출을 적극 타진하고 있다. 최근 국내 가전시장에 '메이드 인 유럽'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전동공구로 유명한 보쉬는 최근 국내에 271리터 빌트인 냉장고를 출시했으며 일찌감치 국내 시장 공략에 나섰던 스웨덴의 일렉트로눅스는 스틱청소기 다이나미카 시리즈부터 울트라파워, 빌트인 가전 라인업 전반을 출시하고 있다.

유니레버 코리아 상무 출신인 고희경 대표를 영입한 밀레 코리아는 아예 주방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식 빌트인 가전을 국내에 이식하겠다는 각오다. 영국의 다이슨은 여전히 청소가전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으며 독일의 오디오 음향기기 업체 젠하이저도 11월 초 한국 법인을 설립해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던 이동용 사장을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글로벌 ICT 전자업계의 떠오르는 시장인 인도에서도 유럽 가전업계의 존재감은 날카롭다. 보쉬는 인도에 보쉬 리미티드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지난해 총 매출 16억달러를 기록했고 인도 자동차 시장의 높은 성장률에 힘입어 자동차 산업 분야 매출이 총매출에서 91%가량을 차지한다. 이미 글로벌 100개 나라에 진출한 이탈리아 농업기계 메이커 마스키오 가스파르도(Maschio Gaspardo)는 2010년 세계 최대의 트랙터 생산 메이커 중 하나인 마힌드라&마힌드라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차근차근 바닥을 다지고 있다.

오현승 코트라 인도 뭄바이무역관은 '인도에서 승승장구하는 유럽기업의 성공기업' 보고서를 통해 "유럽업체들은 과감한 투자, 폭 넓은 영업망 구축과 적기 진출 전략을 통해 인도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며 "영업망 구축을 위해서 현지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마케팅 활동을 분담하는 점은 기업의 모든 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하고 싶어 하는 우리 기업의 진출 방식과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분석했다.

▲ 보쉬의 인도 사업 진출. 출처=코트라

체질개선에 나서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ICT 환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자 DNA를 완전히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스가 대표적이다. 1891년 탄소 전구 제조업체로 출발한 필립스는 1927년 라디오, 1950년에는 TV까지 제조했다. 이어 1979년에는 콘텐트디스크 개발에 나서기도 했으며 1997년에는 DVD를 제작하기도 했다.

강력한 연구개발을 통해 2005년에는 의료영상정보 분야에서 세계 2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2006년 휴대전화 및 오디오 등 대부분의 사업을 구조조정하며 새로운 길을 찾기도 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한 '기업의 교과서'다. 2012년에는 TV 사업에서 철수하고 2013년 로열필립스로 사명을 변경하는 한편 2016년, 조명사업부를 독립 법인으로 분리해 또 다른 모험에 나서고 있다. 지금은 헬스케어 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원조 노키아도 마찬가지다. 노키아는 제지회사로 출발해 피처폰 시대를 풍미했으나 애플의 아이폰에 밀리자 어려움을 겪었다. 기업은 분해됐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휴대폰 사업 부문을 한때 인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눠진 노키아의 역량은 스타트업이라는 결실이 되어 모바일 게임 업계의 강자 슈퍼셀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네트워크 사업을 넘어 최근에는 5G와 사물인터넷 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공 청소기의 명가 다이슨도 최근 전기차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무한변신을 예고했다.

▲ 다이슨 전기차 진출 선언. 출처=갈무리

전자와 ICT, 장인정신의 만남
안방을 장악한 후 글로벌 시장 진출에 나서는 유럽 가전업체들은 최근 ICT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무려 118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스위스 명품 주방 브랜드인 쿤리콘은 냄비 및 팬에 사용 가능하여 구이부터 찜까지 다양한 요리를 빠르고 건강하게 완성시켜 줄 스마트 멀티 뚜껑을 출시했다.

▲ 스마트 찜기. 출처=쿤리콘

밀레는 1995년 이미 컴퓨터를 이용해 제품의 업데이트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한 바 있다. 2004년에는 이미 알레르기 환자를 위한 알러워시 세탁기를 출시했으며, 바닥의 청결상태를 알려주는 진공청소기용 알러고텍 위생 센서를 발명했다. 그 여세를 몰아 스마트 냉장고와 사물인터넷 제품들을 대거 공개한 상태다.

전기전자기업 지멘스도 네트워크 인프라를 바탕으로 냉장고, 세탁기, 오븐, 식기세척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을 앱으로 조정하는 스마트홈 기술을 들고 나왔다. 보쉬는 하나의 시스템과 앱으로 구성된 스마트홈을 선보였다.

자동차 업계의 주인공은 여전히 독일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완성차 업체들은 최근 구글과 인텔과 협력해 자율주행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벌 민간 공인인증 기관 튀프쥐드(TÜV SÜD)는 자율주행차량에 대한 안전규정까지 마련했다.

폴란드도 한 칼이 있다. 지난해 기준 폴란드 GDP 전체의 8%가 자동차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폴란드 정부는 국내 자동차 산업을 적극 육성하기 위해 정부지원금, 조세면제, 고용지원 등의 전폭적인 투자지원을 기업들에 부여했으며 그 결과 폴란드 자동차 산업은 식품산업 다음으로 큰 규모를 차지하게 됐다.

스타트업도 힘을 더하고 있다. 네이버와 K-1 펀드로 묶인 유럽의 문화권력,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김영호 코트라 프랑스 파리무역관은 지난 9월 보고서를 통해 로빈 리바통(Robin Rivaton) 파리 지역 기업담당(Paris Region Entreprises) 기관 총국장의 스타트업 현황을 인용했다. 이에 따르면 6월 기준 프랑스 파리 지역에 입주를 신청한 해외 벤처기업 수가 31개로 전년동기대비 30% 증가했으며 파리 지역에만 1만 개의 스타트업이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6년간 470억 유로, 올해 100억 유로 규모 미래산업 지원 펀드를 조성했고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프렌치테크를 운영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 여파로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몸값도 뛰는 중이다. 이러한 ICT 역량은 초연결 시대를 맞아 전자업계 전반의 존재감을 더욱 키워준다는 분석이다.

국내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술명가인 유럽업체들을 압도할 수 있는 기술력을 키우는 한편, 빌트인 중심의 라인업을 키워 현지 맞춤형 전략을 짜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의 데이코를 인수해 빌트인 경쟁력을 키우는 삼성전자와 시그니처 라인업으로 프리미엄 라인업을 구축한 LG전자의 행보에 답이 있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유럽업체들과의 유기적인 협력도 선행되어야 한다. 

유럽 외 시장에서는 ICT 인프라와의 결합으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모바일 이후의 시대는 ICT로 구현된 초연결 패러다임이 핵심이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인프라를 키워 하드웨어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조성해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