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가운데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한 200여개의 방들이 맥베스를 뿜어낸다. 거울과 소품을 만지며 건물 안을 거닐다 따뜻한 조명 아래서 누군가와 키스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꿈결 같은, 어둠과 빛이 자욱한 이곳은 어디일까?

이번에 소개할 퍼포먼스는 현대의 다양한 공간적 체험을 바탕으로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온 하나의 예술 장르, ‘장소특정적 퍼포먼스(Site-Specific Performance)’다.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란 “주어진 장소(Site)에서 발견되는 Properties(특징), Qualities(질, 자질), Meaning(의미)을 전반적으로 사용하는 퍼포먼스”라고 정의되어 있다.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는 그 명칭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어떤 장소가 되었든 그곳의 특징을 살려서 예술화한다는 면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광범위하다.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는 종래 예술 장르가 그래왔듯이 ‘장소특정적 미술’에서 파생했다. 이 장르는 초기에 미국의 예술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에 의해 소개되었고, 이후 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특히 미국의 안무가인 스테판 코플로위즈(Stephan Koplowitz)는 세계 각지의 기념비적인 장소에서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튜브를 통해서도 그의 연작들은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는 공연연출가 김아라에 의해 캄보디아의 역사적인 유적지인 앙코르와트에서 <만다라의 노래(A Song of Mandala)>라는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으며, 그는 이외에도 다양한 장소에서 ‘유적지 연작 시리즈’를 선보였다.

급기야 최근에는 장소특정적 퍼포먼스의 흐름이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장소성’에 포커스를 맞춘 것에서 탈피해 개인적인 공간부터 인적이 드물었던 공간까지 실로 각양각색의 장소들로 무대화되고 있다. 한 장소의 의미와 그 관계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다뤄지던 현대공연예술의 기본 콘셉트인 장소특정적 퍼포먼스에서 요즘은 무대 공간의 의미와 폭마저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 어떤 장소도 예술적 공간, 무대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모든 장소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엄청난 변화기에 어떤 방향으로든 장소특정적 퍼포먼스가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무대를 에워싸고 있던 경계는 무섭도록 빠르게 허물어졌고, 다양한 장소와 공간을 활용한 공연은 이제 더 이상 새롭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만연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에서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라는 장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장소특정적 퍼포먼스가 극장이라는 큰 틀에서 한 겹 벗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소특정적 퍼포먼스가 기존의 공연과 확연히 다른 점은 관객이 더 이상 수동적으로 어떤 공간 안에 앉아 있지 않고 능동적으로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하고 체험한다는 점이다. 그 경험의 과정에서 관객은 그 공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하나의 공연적 요소로 바뀐다. 그 연결 지점이 관객과의 소통과 참여에 포커스를 맞춘 ‘관객성’이다.

어떤 장소를 아예 한 공연을 위한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시켜버린,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공연이 있다. 바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다. <슬립 노 모어>는 2011년 보스턴에서 처음 제작되어 현재 뉴욕과 상하이에서 장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소특정형 퍼포먼스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인 <맥베스>를 재해석한 이 공연은 강렬한 타이틀만큼, 형식과 이미지적 측면에서 굉장히 새롭고 실험적이며 치명적인 매력으로 세계의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있다.

뉴욕의 핫플레이스에 있는 The Mckittrick 호텔 전 층과 200개가 넘는 방들이 모두 이 공연의 무대가 된다. 맥베스의 편린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고, 관객이 스스로 이를 끼워 맞추며 즐기는 퍼즐 같은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는 모든 무대, 즉 장소의 가구, 소품, 배우들의 연기, 의상, 온도까지도 모두 완벽하다. 관객은 이 호텔 건물 안에서 직접 걷고, 듣고, 맡고, 만지고, 느끼며 무서운 공포영화와 같은 장면 속을 거닐게 된다. 거닐다가 연기하는 배우와 조우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뜻밖의 키스를 당할지도 모른다.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연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공연은 관객에게 몇 가지 규칙이 정해져 있다. 호텔에 들어서면 휴대하고 있는 모든 물건과 핸드폰마저도 보관해야 하며, 턱이 길게 나와 있는 유령의 모습을 한 흰 가면을 착용해야 한다. 사실 관객의 입장으로 봤을 때 눈 앞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상황은 그간의 공연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는 무대의 문턱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흰 가면을 착용한다는 규정만 존재할 뿐이다. 바로 옆에서 이뤄지는 배우의 행위들을 보고 있노라면 관음을 넘어서서 자신이 이 드라마의 배우(벤쿠오의 유령 역할)가 되어 연기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연은 처음부터 관객들이 한 명, 혹은 여러 배우들을 ‘따라다니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관객의 동적인 움직임은 분명 배우들의 동선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퍼포먼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과정 중심’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슬립 노 모어와 같은 장소특정적 퍼포먼스는 결국 무대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무엇도 아닌 연극 본연의 속성인 배우와 관객의 관계의 본질주의적 접근을 통해 궁극적으로 소통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장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