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은 광해임금시절 대북에게 기득권을 모조리 잃어버린 서인들이 목숨을 걸고 기득권을 찾기 위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일각에서는 광해임금이 어머니인 인목왕후에게 불효하여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의 정신에 어긋남으로 서인들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정이라고도 하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조명한다면 진실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 인목왕후는 광해임금의 친모가 아니다. 광해임금이 공빈 김씨의 몸에서 서자로 태어났으나 세자로 책봉이 되면서 중전의 아들로 입적되는 당시의 관행에 의해서 인목왕후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친모가 아니니 불효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광해임금이 대북파의 폐모론에 의해 인목왕후를 삭호(削號)하여 서궁에 유폐시킨 데에는 광해임금과 대북파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광해임금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선왕인 선조가 원해서가 아니다.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었었다. 그런 선조의 마음을 모르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상소를 했던 정철은 파직과 유배를 당하는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는데, 피난길에서 신성군은 죽고, 왕은 의주로 피난을 가지만 누군가가 조정을 지켜야 하기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것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전란에 휩싸인 백성들을 보호하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세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과 군수품을 모집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등 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키기에 온 힘을 쏟았고, 그 결과 많은 신임을 얻기도 했다.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으로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적자로 세자를 바꿔야 한다고 소북파가 주장했고, 광해는 위기에 처했지만 영창대군이 불과 세 살이 되던 1608년 선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어린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뒤로 한 채 즉위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광해가 왕으로 즉위했지만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은 영창대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영창대군은 아직 엄마 품에서 놀기 바쁜 나이의 어린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를 둘러싼 세력들이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행위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광해임금이 왕위에 있는 것과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부와 권력의 측면에서 비교도 안 되게 크나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적자 즉위론 운운하는 것은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나라를 주무르겠다는 것이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것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보위에 있는 광해임금은 임진왜란에서 분조를 이끌며 나라를 위해서 왜군과 직접 맞서 싸운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자 운운하면서 아직 아무런 판단도 못하는 어린 영창대군의 즉위론을 왜 들고 나왔는지는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어린 왕을 보위에 앉히고, 그 측근들이 정치를 쥐락펴락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광해임금의 즉위와 통치에도 불구하고 어린 영창대군 즉위론을 들고 나온 일당은 계축옥사에 의해서 제거되고 광해임금을 중심으로 한 대북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리고 계축옥사가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에 의해서 주동되었다는 판단에 의해 광해임금은 어쩔 수 없이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광해임금의 인목왕후에 대한 조치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에서 양대 중심축을 이루던 충·효 사상 중 효를 저버린 왕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는 사건이다. 인조반정이 정당하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명분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비록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불효를 명분으로 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대에 광해임금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