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신분차별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겼으며,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애고 열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다. 그 당시 양반들이 유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천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에서 참선을 하는 등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고 그로 인해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인물이다. 그리고 1615년 동지 겸 진주부사 중국에 다녀올 때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면서 귀국할 때 많은 책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중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개혁적이고 세계지향적인 인물이었다.

허균의 그러한 행동들이 기득권 세력에게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허균의 사상과 행동이 기득권을 앗아갈 수 있는 혁명으로 보였고, 허균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들여다 볼 것은 허균의 사상과 언행이 일치했다는 점이다. 만일 허균이 실제로는 서얼들을 우습게 여기면서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서만 신분타파와 이상 국가를 부르짖었다면 그것은 한낮 외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양반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는커녕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취할 실을 챙겨가면서 불쌍한 백성들에게는 소설책 한 권 던져줌으로써 한풀이나 해 보라고 백성들을 능멸한 것이다. 그러나 허균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을 벗고 양반의 굴레에서 벗어나 백성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하기야 허균은 이미 과거를 보기 전부터 개혁적이고 올곧은 사상을 드러낸 사람이다. 지지부진하게 주변의 눈치를 보거나 벼슬에 연연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첫 부인과 어린 아들을 잃고, 종전 후 과거를 준비하던 중 그 유명한 <김종직론>을 지어 사림에게 충격을 안겨준 사람이다.

<김종직론>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천하에 이득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김종직은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라고 하니 과거를 보고,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도 벼슬을 받았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로 뛰어올랐다. 오히려 더 벼슬을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당해야 한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행적은 살펴보지 않고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리는 것이 안타까워 기록한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면서도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아 호의호식했다는 것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한 글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입으로는 나라와 종묘사직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추구에 열을 올리던 당시의 관리들을 싸잡아서 욕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허균은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당하고 당대는 물론 훗날에도 인신공격과 비방의 원인이 된다. 허균이 이런 글을 쓰면 훗날 자신이 비방을 당할 것임을 몰라서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비방을 당할지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친 것뿐이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 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 옛말 그대로, 허균은 타고난 사상가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관리였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사랑하는 관리였다.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삶으로써 스스로 양반이라는 기득권을 내려놓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되는 지금에도 기억되는 인물이고, 이 어지러운 세상에 조언을 구해보고 싶은 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백성들과 소통하겠다고 취임 전에 일성하던 이 나라 국무총리는 막걸리를 몇 번이나 마셨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