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야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윤동주 전집, 詩 달밤, 권영민 엮음, 문학사상 刊>
달빛이 아주 덤덤한 표정으로 창호지를 슬쩍 집적거리며 지나갈 즈음인가. 간다온다 말없이 그렇게 아아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들과 동행하는 빛을 겨우 달래어 불러 세웠다. 그 달빛에 어린, 무릇 숱한 사연들이 적막 속 마치 예정된 길을 가는 늑대의 행렬처럼 정연하구나. 바스락, 단 한 번의 소리도 없이 마음의 배열은 가늘게 떨리고 발돋움하는 연정은 들킬까 문풍지 울림을 핑계 삼아 그 대열을 따라 나선다. 불현 듯 유년의 소꿉놀이가 달빛에 어른거리누나.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를 뚫어 밖을 내다보던 즐거움이 어쩌면 그땐 그리도 재미나던지. 그 캄캄한 어느 날 밤, 화면의 검은 면에 뚫려진 부정형구멍처럼 그곳으로 맑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훅 들어와 어린 내 가슴에 그냥 안겨버리는 그 달빛이어라. 기쁨과 슬픔, 기원과 시시콜콜한 얘기마저도 외면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며 교감해주던 하여 외로움에서 건져 올린 내 가슴에 영원한 보석으로 새겨져 있는 오랜 친구인 것을….
연회색, 연푸르게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온다. 반 투병한, 빛을 받았을 때 약간 반짝이는 결은 유년시절 오목조목 조각보를 잇던, 달밤 호롱불아래 다듬이 일을 하던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히 떠 올리게 한다. 깊어가는 가을밤, 달과 함께 다시 얘기를 나누네.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시간에 부르는 내 마음의 노래, 그리움이여!
◇뒤편까지 배려하는 심중의 징표
화면은 한글의 글꼴이 가진 형체로 단순화시킨 작품이다. 회흑색 분청사기가 백토물에 덤벙 적셔져 올라오는 듯, 화면의 하단엔 목탄에 그을린 자국 위 묽은 혼합 안료를 얹었다. 그럼으로써 달빛과 조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더욱 생생해 졌다. 흑백이 주조(主潮)이지만 먹으로 된 면과 선은 분청사기의 흑색이거나 진한 갈색이든지 그런 문양을 연상케 한다.
묵직하게 때론 밝고 정겨운 풍경은 달빛을 머금었다. 목탄과 먹이 어우러진 또 한지의 조직과 목탄입자가 서로 이뤄짐으로써 반질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우리 질그릇과 같은 느낌의 질감을 드러내 보여준다. ‘달빛 어린-빛이 어둠에 내릴 때’작품은 달빛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건물이나 어떤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위로는 달이 휘영청 밝고 아래는 거대한 물체를 그리면서 달빛의 앞면은 밝겠지만 뒷면을 화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부드럽고 온화한 배려의 심상으로 인도한다. 부연하자면 온 천지를 달이 비치지만 어둠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그곳에조차도 교교하게 스며드는 형상성을 내포하고 있다. 항상 앞에 보이는 것보다 뒤의 배후까지도 이른바 세상 구석구석까지 비칠 수 있기를 바라는 진솔한 마음의 징표가 담겨있는 것이다.
황인혜(ARTIST HWANG IN HYE, 黃仁惠)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감히 빛을 그릴 수는 없다. 너무나 존엄한 대상이니까. 다만 그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받은 그 빛을 되돌려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좋은 기운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그런 마음으로 달빛 어린 작업에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