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정치라는 것이 있었다. 원칙은 미리 정해 두되 매 사안을 직접 의견을 구해서 결론 내리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번거로울 것 같다. 복잡할 것도 같고 매 사안 대립하는 양측 의견을 일일이 듣고 협의해서 결정하자면 효율성이 떨어질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진 결정은 강한 실행력을 가지게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실행을 위한 결정을 이끌어 내는 해법으로서는 오히려 진보된 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여론 정치를 사실 우리 선조들이 먼저 해 왔다. 21세기인 지금 벌어지는 정치판보다 오히려 더 진보된 정치 시스템이었다 생각된다.

흔히 지나온 역사는 과거로 치부되면서 뒤떨어진 것으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그 때가 오히려 지금보다 앞선 것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 중의 하나가 조선의 뛰어난 기록 문화다. 여론정치의 단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기록이라 해서 열심히 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는 사람이 잘 적을 수 있도록 그 권한을 인정한 원칙에서 출발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기록물이라 생각한다.

 

움직임은 左史, 말은 右史가 담당, 생생한 현장중계

조선왕조실록에는 당대의 생생한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어 마치 현장 중계라도 하는 듯한 우수한 기록이자 훌륭한 역사서라 한다. 실록은 3단계를 거쳐 편찬되었다. 한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춘추관에서 실록청(實錄廳)이 만들어진다. 실록청은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과 판서 같은 고위직들이 겸임하는 자리와 춘추관 소속의 전임으로 나뉘는데, 서술 권한은 겸임 고위직들이 아니라 전임 하위직 즉 사관들에게 있었다.

실록청은 우선 세상을 떠난 임금과 관련된 사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으는데 사관들이 매일 기록한 기록물들이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말은 물론, 동작까지 묘사되어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말과 동작까지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움직임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가 각각 담당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연 기록물, 즉 임금과 정사를 토론했던 경연관들도 경연 때에 나누었던 내용들을 기록으로 제출했는데, 사관의 기록물인 시정일기(施政日記)와 경연관의 제출 기록 등이 실록 편찬의 기초사료가 되었다.

기초 사료들을 모아놓고 나서도 세 차례의 편찬과정을 거쳐야만 하는데, 사료를 모아서 1차로 작성한 원고를 초초(初草)라고 하고, 검토하고 수정한 원고를 중초(中草)라 하며, 이를 다시 수정 보완한 것이 최종본인 정초(正草)가 된다. 정초를 교서관(校書館)에서 인쇄해 서울 춘추관(春秋館)과 지방 외사고(外史庫)에 봉안했다. 그러고 나서 초초, 중초, 정초는 물에 씻어 지워버리는 세초(洗草)를 했는데 세검정 부근 차일암에서 세초연이라는 행사를 베풀어 실록편찬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벌였다.

 

‘기록하는 권리' 직필의 신념을 지켜온 역사

중요한 것은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국왕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정사에 필요한 부분은 승정원 관리 같은 사람들이 해당 부분만 등서(謄書)해서 볼 수 있었다. 사관들의 경우 대신들은 물론 임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필(直筆)할 수 있는 권한을 철저하게 보장했다.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대왕도 실록 기록이 궁금하여 몇 번씩이나 사서를 보여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재상인 황희가 그때마다 단념할 것을 권하였고, 결국에는 임금도 사서를 보기를 포기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관의 ‘기록하는 권리’를 철저히 지켜왔다. 사관은 이를 천명으로 생각하며 한 획 한 획에 신념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우리 선조들만큼 확실하게 기록에 대한 권한 존중을 생활화 했던 국가가 어디 있을까 싶다. 이런 기록 정신이 오늘날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과거(過去)라는 말이 그렇듯, 조선시대라는 말도 오래되고 케케묵은 듯 한 느낌이다. 하지만 더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측면도 많다. 특히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의 체제와 시스템을 창조하고 정착시켰다.

조선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삼사(三司)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절대지존인 왕과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세 가지의 기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이다. 이 세 기관은 그냥 왕명을 받아서 하달하거나 집행한 것이 아니라 간쟁(諫諍)을 했다. 간쟁은 어른이나 임금처럼 윗사람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말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왕에게 ‘이러지 말라, 저렇게 하라’는 식의 의견을 올린 것이다.

상당히 체계적인 견제장치를 정착시켰던 것이고 사대부 정치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삼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대간(臺諫)이라고 하면서 또 언관(言官)이라고도 했다. 언관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커뮤니케이션을 체제에 녹여서 가장 중요한 통치 원리 중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삼사 중에서도 특히 사간원이 왕에게 간쟁하는 역할을 맡은 집단인데, 한마디로 왕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기관이다. 아래 사람에게 뭔가 이야기 하거나 시킬 때도 적절한 논리와 근거가 필요한데 하물며 절대지존인 임금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사간원은 의외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 요즈음의 브레인 스토밍과 같이 격식 없는 토론에서 더 좋은 생각이 나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한다.

사헌부는 규율이 아주 강한 곳이었다. 다른 관료들의 직무를 감찰하고 공직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했기에 내부 규율이 매우 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운영예산도 늘 부족해서 여기저기서 자금을 융통해 사용했다.  오래되고 헤지다시피 한 관복을 입으며 청렴 결백의 상징으로 꼿꼿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회의 할 때 늘 차를 마시면서 진행했기에 회의를 다시(茶時)라고 했다. 나중에는 사헌부가 사간원의 역할인 간쟁을 자주 떠맡았는데, 왕이 간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사직을 하거나 더 강한 방법으로 밀어 부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론직필 (正論直筆)이라는 언관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고 있던 곳이 아닌가 한다.

홍문관은 정치연구 및 왕의 자문역할을 주로 담당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한 뒤 세운 문서보관소에 불과했으나 성종이 사림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위세가 올라갔다. 세조 즉 성종의 할아버지가 폐지한 집현전을 차마 바로 부활시킬 수는 없었기에 내린 차선책이었다. 세종시절 유명했던 집현전 정통성을 이어 받은 만큼 연구와 학구적인 분위기였다. 사헌부나 사간원처럼 권력에 대한 견제가 주 업무는 아니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조선이었던 만큼 그 중요성은 계속 이어진 것이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간쟁을 했는데도 왕이 계속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홍문관 관리들도 나서서 간쟁에 참여했다. 그만큼 홍문관도 무시할 수 없는 기관이었고,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곳이 태도를 바꾸어 도리어 왕을 견제하게 되면 제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은 무시할 수 없었던 듯 하다. 정책결정의 최종변수였던 만큼 정승 중에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조선의 삼사는 군주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왕 입장에서는 당연히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없애지 않고 통치 시스템 속에서 계속 운영했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의 우수함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수결의 민주주의를 뛰어 넘는 커뮤니케이션 정치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왕이 이런 간쟁을 무시하고 독단을 저지른 적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항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어려운 일을 처리해 나간 것을 보면 과연 조선 이외의 어느 국가에서 이런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통치가 가능할까 싶거니와 지금의 정치시스템과 비교해 보더라도 오히려 더 우수하지 않나 생각된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적절한 결정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보다 우수한 시스템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표 방식으로 알고 있는 다수결은 그런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막판에 선택하는 방법이 아닐까?

견제와 균형 속에서 체제를 유지시켜온 우리의 선조가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생각이다. 스마트폰과 IT 기반의 시스템은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물리적 전달을 현격히 발전시켰지만, 그만큼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요즘도 과연 옛날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과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정신에 맞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가 있을까?

조선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뒤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지금은 정도전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미스테리한 인물 그 자체였다. 뭔가 훌륭한 듯 하면서도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는 인물 같았던 기억이다. 조선 왕조는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정부가 들어서고 그 뒤로 체제의 변화와 시대적인 분위기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정도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자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오해될 정도였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을 도모하며 법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왕실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의 땀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랬던 그였지만 정작 기록에는 야비한 인물 정도로만 그려져 있다. 정도전에 대한 실질적 재평가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옛 문헌에 기록된 그대로를 믿을 뿐이다. 실록에서 죽기 직전의 기록은 ‘배불뚝이’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초기 백성들은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배가 나왔다는 것만 하더라도 욕심 많고 재산까지 탐하는 인물로 설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도전은 고려 우왕 시절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나주로 유배를 간다. 10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심문(心問), 천답(天答) 등을 저술했고, 유배생활을 끝내고 이성계를 만나면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로 결심한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 핵심으로 부상하자 개혁세력을 규합하여 조선건국을 실행한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짓고, 도시계획을 세우고, 법전을 편찬하고 정치와 인사를 관장했다. 한마디로 ‘건국 초기 조선의 모든 것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배불뚝이가 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내세워 조선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기틀을 세웠다. 문헌이나 제도에만 그치지 않고 한양의 도시계획 하에 거리를 설계하고 경복궁을 만들고, 궁 내 각종 시설물에 대한 설립과 명칭까지 총괄하여 지휘하고 진행했다.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데, 경복궁 전각 하나 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서 그 의미를 실천하고자 했고, 4대문에도 ‘인, 의, 예, 지, 신’의 사상을 심었다.

한양의 중심도로인 세종로와 태평로의 골격을 만들고 태평로에 해당하는 광화문 남쪽 거리 좌우로는 6조와 삼군부를 비롯한 중앙관청들을 세우고 동서남북대문을 만들었다. 동서대문을 연결시키는 운종가에는 상인들이 자리잡게 하고 북쪽은 북촌으로 관청과 상류층 주택가였고 남쪽인 남촌은 상인이나 하층민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증거로 피맛골 같은 독특한 거리도 형성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정치시스템 같은 것이든 정도전 덕택에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종이 비록 정도전의 삶에 직접 종지부를 찍고 그의 기운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기는 했지만 시행한 정치철학 대부분은 정도전의 사상에서 기인했다. 태종은 정도전이 살던 집을 허물고 그곳에 마구간을 만들고, 땅의 기운이 올라오지 못하게 말이 짓밟게 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도전을 지웠다. 1970년대까지 서울 경찰청 기마대 자리로 이어졌다.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로 종로구청 정문 서쪽 화단 있는 곳이다.

우리는 드라마에서 당파로 나뉘어 서로 헐뜯는 모습만 봐왔는데, 사실 지존이 앞에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신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하고 서로간의 생각을 모아나가는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조선 외에는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이런 시스템의 병폐로 동서남북인들이 붕당을 지어 전체 국가의 이익 앞에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던 폐단이 일어난 점은 안타깝고도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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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수결의 민주주의 보다 커뮤니케이션으로 합일치하는 것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2.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3. 역사에 빛나는, 생각을 모아 나가는 커뮤니케이션 정치는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