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삼성전자 천안 공장에 근무하면서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근로자 이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요양 불승인처분 취소소송을 청구한 사건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1·2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1·2심 판단과 달리 원고의 업무와 업무상 재해인 다발성 경화증 발병·악화 사이에는‘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판결).

▲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동안 대법원은 보수적 판결이 증가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출처=이코노믹리뷰DB.

이씨는 여러 지역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았으나 정확한 질병 진단을 받지 못했고, 그 사이  증상은 더욱 악화돼 결국 지난 2007년 2월 퇴사했다. 퇴사 후 2008년 9월에서야 대학병원에서 어렵사리 다발성 경화증 확진을 받은 원고는 자신에게 발생한 다발성경화증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지난 2010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다. 원고인 이씨는 1984년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2년에 삼성전자에 입사, 천안 LCD공장에서 모듈공정(부품을 조립하고 LCD패널을 완성하는 공정)중 LCD 패널 검사작업을 하다가 재직중 다발성 경화증이 발생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부실한 역학조사로 인해 지난 2011년 2월 원고인 이씨는 피고인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요양불승인처분을 받자, 그 해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1, 2심 모두 패소했다. 

원고가 화학물질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등 개별 위험요인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출 정도가 높지 않아 원고의 업무와 다발성 경화증 발병·악화 사이에 어떠한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입장은 달랐다.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원고가 입사 전 건강상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다발성 경화증과 관련된 유전적 소인, 병력이나 가족력도 없는데,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재직하던 중 우리나라 평균 발병연령인 38세보다 훨씬 이른 시점인 만 21세에 발병한 점  원고의 경우 업무적으로 다발성경화증의 직접 발병원인인 유기용제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업무상 스트레스, 햇빛노출 부족에 따른 비타민 D 결핍 등의 사정이 중첩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역학조사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었고, 사업주와 관련 행정청이 해당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등에 관한 정보가 영업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원고가 유해화학물질의 구체적 종류나 그에 대한 노출 정도를 증명하는 것이 곤란해진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는 점 등의 간접사실만으로 원고의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대법원의 이같은 입장은 그동안 대법원이 보여줬던 ‘상당인과관계’인정과 관련한 실무 사례(실무례)에 비춰 보면 매우 파격적이다.

‘상당인과관계’ 인정에 대한 대법원의 공식 입장은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근로자의 취업당시 건강상태 작업장의 유해요인 유무,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의 제반 사정을 고려해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른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대법원 2004. 4. 9. 선고 2003두12530판결, 대법원 2008. 5. 15. 선고 2008두3821판결 등 참조)”는 것이다.

얼핏 판례 문구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 법원이 업무와 업무상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폭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행정실무 및 하급심 법원에서는 이 사건 1, 2심 판단과 같이 작업환경의 개별 유해 요인을 따로 떼어내어 개별 유해요인(개별 화학물질)마다 위험 정도 또는 위험에의 노출 정도가 적다는 판단을 하고, 나아가 그런 부분적 판단을 집적해 전체적으로도 업무와 업무상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실무적으로는 상당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원고가 흔히 법원에 신청하는 의학감정결과에서 업무와 업무상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취지의 명백한 직접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원고로서는 간접적인 정황증거만으로 상당인과관계를 인정받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책임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원고, 즉 근로자는 입증책임의 정도에 있어서도 간접증거만으로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받기 어려운 위험부담을 안고 소송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대법원이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원고의 입증책임 정도를 전향적으로 완화시켰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대법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이 같은 상당인과관계 입증책임의 완화는 아직 유해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직업병의 경우에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법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같은 작은 변화는 원고 승소율 10% 남짓에 불과한 산재소송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맞서 싸워야 할 근로자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법조계가 이번 판결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진보정부 출범에 발맞춘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 등 대법원이 앞으로 이 같은 파격 판결을 이어나갈지도 주목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