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불거진 청와대 비선실세 논란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조기대선이 치러졌고 전국에 촛불이 타올랐으며, 전직 대통령이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재계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실상 해체에 돌입했고, 급기야 재계 1위 기업인 삼성은 미래전략실 해체,  총수 장기 유고 사태까지 맞았다. 지난 2월 구속 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오늘(25일) 1심 선고로 영어속의 시간을 이어가게 됐다. 하지만 모든 사태의 핵심에는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정경유착’이란 악습이 자리하고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시각이다.

▲ 고 이병철 회장. 출처=삼성

정경유착과 산업역군의 사이

삼성은 고 이병철 창업주가 1938년 3월 대구에서 자본금 2만원으로 연 삼성상회가 모태다.  대구 특산품인 능금과 동해의 건어물을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에 수출하며 몸집을 불린 삼성은 1969년 1월13일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고 1977년 삼성산요전기를 흡수합병해 1984년 삼성전자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주력은 스마트폰과 반도체, 부품, 그리고 가전제품이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갤럭시 신화로 대표되는 스마트폰 경쟁력과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부품 경쟁력을 동시에 가다듬고 있다.

삼성의 눈부신 성장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엄청난 성공모델이 됐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땅에서 한강의 기적을 넘어 세계경제사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2분기 기준 전체 반도체 시장 1위, 메모리 반도체 중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삼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면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정경유착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 정권과 유착해 사업이득을 챙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건희 회장 당시에도 정경유착의 그림자는 여전했다. 

삼성 외 거의 다른 대기업들도 정경유착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정경유착 혐의로 5공 청문회 현장에서 엄청난 질타를 받아야 했으며 그 외 대부분의 ‘회장님’들도 비슷한 혐의를 받았다. 산업화시대에 높이 쏘아올린 성공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이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선 삼성

삼성은 지난해 말 비선실세 논란에 휘말려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되는 최악의 시련과 직면했다.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일시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있었으나 장기간 그룹의 컨트롤 타워가 방치된 적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분명히 ‘가보지 못한 길’이다. 이는 전경련을 탈퇴하고 미래전략실을 폐지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다.

과거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은 자기 이익을 위해 정권과 손을 잡았으나 이는 생존의 문제라는 측면이 있었다.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을 종속시키려 했으며,  정치권력이 총과 칼로 무장했을 때 정치권력은 맹위를 떨쳤다. 이 부회장을 영어의 몸이 되게 한 박근혜정부도 마찬 가지였다. 그렇기에 정경유착 근절을 위해 메스를 들이 대어야 하는 쪽은 오히려 정치권력일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삼성 또한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숙제를 받았다. 오너 경영의 장단점이 뚜렷한 상태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의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경유착의 질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이날 "정경유착은 국가권력의 사유화나 다름이 없다"면서 "소수 경제기득권 세력이 뇌물로 국가를 동원하는 한편 정치권력은 그 대가로 사리사욕을 취하는 반사회적 범죄행위를 끊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도 논평을 내고 “재벌대기업이 정권과 결탁하여 특혜를 받는 노골적인 정경유착이 발생했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2월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대안을 제시한 손창완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군사독재 시대 정부 주도의 산업화 과정이 추진되며 경제를 살려야 하는 정권과, 이에 부합한 경제인들이 결탁해 재벌이 탄생했다”면서 “군사독재 기간이 길어지며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고, 재벌은 이들에게 협력해 현재에까지 이르는 정경유착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정경유착 문제의 해결을 경제보다는 정치에서 찾았다. 그는 “자발적인 정치인 후원 문화가 없는 국내 정치계의 특수한 상황과 지역구 관리비용이 과다하게 소요되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면서  “나아가 제왕적 대통령 권력 집중, 인사권을 매개로 관료를 통제하는 정치 문화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이 자정활동에 나서는 한편, 합리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관리에 나서야만 정경유착의 ‘수요자’가 사라진다는 논리다.

이봉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양한 힘의 균형이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재계 총수의 무소불위 권한을 해체하고 지주회사 전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상’도 지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정경유착 해법은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최근 글로벌 자동차 업계를 충격에 빠뜨린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도 일종의 정경유착 산물로 본다. 

미국은 철강왕 록펠러가 지나치게 몸집을 키운 상태에서 온갖 사회적 문제가 불거지자 반독점법 위반을 적용, 기업을 30개로 쪼개 공중분해시켰다. 이후 로비의 합법화로  로비스트 전성시대를 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배후에서 움직이는 대관 업무 담당자들이 떳떳하게 정치인들을 만나고 지원을 하도록 한 것이다.  정경유착 양성화로 이해되는 ‘로비의 합법화’에도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극단적이고 치명적인 폐혜는 없다는 주장이 중론이다.

결국 정치·사회·문화 전 영역에서 고민에 따른 ‘결단’이 정경유착과의 질긴 악연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글로벌 기업인 삼성도 과감한 용단을 통해 `새로운 삼성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매출의 90%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하는 데 국내에서 정경유착하는 게 경영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고 반문하며 단절의지를 거듭 밝혔다.

줘도 패고, 안 줘도 패는 권력

정경유착 문제해결에 나서기 전, 확실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금전 도움을 요청하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설 때 ‘저희는 괜찮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해야만 법 위반이 안되는 것을 잘 안다”면서  “그러나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에 걸려든 기업인의 입장은 감사한 것이 아니고 앞이 캄캄해진다”고 말했다.

권력자가 금품을 요구한 후 기업의 당면 현안을 파악,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을 때, 기업인이 ‘정의(正義)’ 운운하며 그 도움을 거절하면 권력자가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참 청렴한 기업인이라고 칭찬만 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기업인은 '괜한 거절로 권력자가 당면 현안 문제에 재를 뿌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하는 게 세계 10대 경제대국 한국의 현실이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권력자가 기부를 강요할 때 거절할 수 없어 돈을 갖다 주지만 반대급부로 무엇인가를 도와준다고 할 때 그물에 걸려든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호의에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면 이미 (달라고해서)전달한 금품일지라도 뇌물로 바뀌고, 호의를 거절하면 오히려 괘씸죄에 걸린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대통령이 금품을 요구할 경우, 기업인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재계를 대변하는 경영자총협회의 김영배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장관 초청, 30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간담회에서“(권력은) 안 줘도 패고 줘도 팬다”고 말한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업인도 보호받을 '권리'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비리사건이 터질때마다 대기업과 기업인만 비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이 기업인들의 약점을 잡고 금품을 요구하는 관행을 없앨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한다”면서  “법으로 기업인을 보호하지 않는 한 인허가권은 물론 세무조조사까지 할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인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정경유착 비리가 끊이질 않아 온 국민은 열받고 기업인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는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항변이다.  이제 정치권력이 기업인에게 손을 벌리는 `적폐`도 청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