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노연주 기자

일상가젯 - 그 물건과 일상에 얽힌 그렇고 그런 이야기

주말이면 알람을 꺼둔다. 평일 버릇에 일찍 눈을 떠도 굳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취방에 든 햇살이 부담스러울 때야 몸을 일으킨다. 아침은 당연히 못 챙겨먹는다. 침대에 붙어 한참 폰을 만지다보면 정오가 되기 일쑤다.

첫 끼니는 아점(아침+점심)도 아닌 점심이다. 자취 경력이 짧지 않은데 집에서 이것저것 해먹는 스킬은 터득 못했다. 주말이면 매번 3가지 중 하날 택한다. 나가서 사먹거나, 배달음식 시켜먹거나, 라면을 끓이거나.

저번 주말엔 3번을 택했다. 그것도 구석에 박아둔 컵라면을 꺼내먹었다. 주말에 자취방에서 혼자 첫 끼로 컵라면이라니. 세상 비루하다 여길지 모른다. 난 괜찮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새 전기 주전자로 끓인 컵라면이니까.

 

워너비 전기포트

‘그깟 전기 주전자가 뭐라고.’ 이런 소릴 들일지도 모르겠다. 내 전기 주전자 혹은 전기포트 혹은 커피포트는 다르다. 한 줌의 비루함을 덜어줄 특별한 물건이다. 주전자 이름은 발뮤다 더 팟(BALMUDA The Pot).

발뮤다는 일본 라이프스타일 가전 브랜드다. 제품군은 많지 않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진한 감성과 스토리가 녹아있다. 선풍기든 토스터든 한국에서도 워너비 가전으로 불린다. 가격대는 좀 있는 편이다. 전기포트가 19만원대이니.

▲ 사진=노연주 기자

언젠가 예쁜 선풍기 하날 본 적 있다. 선풍기라는 흔한 물건인데도 아우라가 남달랐다. 자꾸만 눈이 갔다. 알고 보니 발뮤다 그린팬S였다는. 그때부터 ‘발뮤다’ 하면 내 머리엔 ‘디자인’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디자인의 발뮤다다.

이런 얘기도 들어봤다. 남편이 전기포트며 토스터며 주방에 널브러진 가전을 수납장에 넣어 정리했다. 당연히 아내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혼났다. 아내가 말했다. “꺼내두고 보려고 산 발뮤다인데!” 역시 디자인의 발뮤다.

 

사용경험까지 디자인하다

더 팟도 디자인으로 사람 홀리는 물건이다. 다른 전기포트보단 예쁘장한 주전자와 더 닮았다. 물을 따르는 길쭉한 노즐이 포인트다. 전원을 켜면 손잡이 끝에 달린 램프가 들어온다. 그 안에 촛불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가느다란 불빛으로 자취방 주방을 밝힌다.

감성 101%다. 발뮤다는 더 팟으로 2017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뚜껑엔 한글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뚜껑이 완전히 닫혔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감성을 1% 정도 깎아먹지만 어쩔 수 없다. 전기주전자 국내 법규에 따라 각인한 문구다.

▲ 사진=노연주 기자
▲ 사진=노연주 기자

더 팟은 일반 전기포트보다 왜소하다. 최대 용량 600ml다. 커피 3잔, 컵라면 2인분 용량. 작다고 실망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실제 사용해보면 이게 적정 크기란 생각이 든다. 따져보면 전에 있던 전기포트에 물을 가득 채울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제품 무게만 무거웠지. 더 팟은 물을 가득 채워도 들기 쉽다. 가벼우니 더욱 안전하고. 그립감 좋은 손잡이는 덤이다.

주전자 느낌 노즐 덕분일까. 더 팟은 내가 원하는 위치에 정확히 물 줄기를 내리 꽂아준다. 뜨거운 물을 붓다가 쏟아 당황할 일이 없다. 물 줄기를 깔끔하게 끊어주기에 제품 표면에 물을 묻힐 일도 거의 없고. 물 줄기 굵기도 자유자재로 컨트롤된다. 노련한 바리스타라도 된 기분으로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사실 철저히 디자인된 사용경험이다. 테라오 겐 발뮤다 대표는 향이 풍부한 드립 커피를 만들고 싶었다. 수차례 시도하다가 전기포트가 영 불편하게 다가왔다. 너무 무겁고, 물을 붓는 게 불편했다. 포트에 물을 끓여 드립 주전자로 옮기는 과정도 복잡하고.

그는 새로운 전기포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쉽고 깔끔하게 물을 부을 수 있는 노즐과 핸들 형태를 고민했다. 수많은 시험작을 만들었고, 바리스타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 그 결과가 더 팟이다. 사용경험이 섬세하게 디자인됐다는 얘기다.

혹시 일본 가전이면 110V라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해외 직구로 사면 그렇지만 한국리모텍에서 공식 수입해 220V 모델을 판매 중이다. 정식 수입된 더 팟 곳곳엔 한글이 적혀있어 직관적이다. 한국리모텍을 통해 A/S도 가능하다.

▲ 사진=노연주 기자

 

자취방 컵라면이 어때서?

“우리가 제품을 구입하는 건 사물이 아닌 경험을 사는 거다.” 발뮤다의 철학이다. 그들은 사물이 아닌 경험을 판다. 테라오 겐 대표는 말했다. “주방에서 시간이 더 즐거울 수 있도록 그동안의 생각과 경험을 더 팟에 담았습니다.”

난 어떤 경험을 사길 원한 걸까. 더 팟을 주방에 들이고 분명 ‘경험의 전환’이 일어났다. 컵라면 물 끓이는 시간이 전엔 끼니를 떼우기 위한 귀찮은 과정이었다. 이젠 근사한 요리를 하는 느낌이랄까. 발뮤다의 선물이다.

사고의 전환도 일어났다. “비록 좁아터진 자취방에서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컵라면이나 끓여먹는 신세지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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