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영역에서 ‘정치’라는 소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피됐던 소재다. 특히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경우는 더 그랬다.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콘텐츠의 파급효과를 우려한 ‘권력’이 창작물을 감시, 검열하고 있다는 업계의 소문들이 직간접적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콘텐츠 창작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의 부조리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비판해왔다. 그 중 가장 우회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수사(修辭)를 활용한 콘텐츠는 ‘만화’다. 서사 구조에 현실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의 내용을 담아 명작(名作)으로 남은 만화 콘텐츠들을 소개한다. 

<은하영웅전설>  SF의 ‘전설’이자 정치 대하 드라마 

“정치의 부패란, 정치가의 부정축재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개인의 부패에 지나지 않아. 정치가가 뇌물을 받아도 그걸 비판하지 못하는 상태를 정치의 부패라고 하는 거지”

“법을 준수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것이야. 하지만, 국가가 스스로 정한 법에 반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려고 했을 때, 그걸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시민으로서 오히려 죄악이지. 왜냐면 민주국가의 시민에게는 국가의 범죄나 오류에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이야”

                                                 - <은하영웅전설> 주인공 '양 웬리'의 대사 中 -

▲ 출처= 은하영웅전설 공식 홈페이지

<은하영웅전설(銀河英雄伝説)>은 일본의 SF(Science Fiction, 공상과학)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가 1982년 출판사 도쿠마 쇼텐(德間書店)을 통해 출간한 과학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만화다. 소설 원작은 한국에서도 100만 부 판매 기록을 세울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본 작품은 황제와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있는 전제정치의 은하제국(銀河帝國)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행성동맹 두 세력의 대립과 전쟁, 그리고 통일의 과정들을 그려냈다. 제목만 보면 본 작품은 은하(銀河)라는 우주적 규모의 가상 세계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SF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권력자들의 정치 암투,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국민들의 희생이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은하제국의 귀족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황제의 권력을 이용한다. 귀족 가문은 사회에서 특별 대접을 받고 초월적 권력을 부여받는다. 그렇지 못한 일반 서민 계급, 군인들은 귀족들의 정치 놀음에 희생되는 '장기말'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로는 완벽하게 은하제국과 반대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유행성동맹의 정치도 은하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맹 정당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은하제국을 '용서할 수 없는' 주적(主敵)으로 간주하고 승산이 없는 전쟁을 부추겨 무수한 생명들을 희생시킨다. 그 와중에 권력자들의 가족은 병역 의무를 면제받기도 하며, 다수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무력으로 잔혹하게 탄압당한다.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상상의 설정에 현대 정치의 모순을 고스란히 담아낸 <은하영웅전설>은 출간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매니아들에게 다시 읽히며 '전설'과 같은 명작으로 남아 있다. 

 

▲ 만화 <쥐> 합본판. 출처= 네이버 책

<쥐>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역작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Maus: A Survivor's Tale)>는 스웨덴의 만화 작가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의 작품으로 1992년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문학·음악상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초의 만화다. 

본 작품은 폴란드의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가 전체주의 정권인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그렸다. 작중에서 유대인들은 ‘쥐’로, 독일인들은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로 프랑스인은 ‘개구리’로, 폴란드인은 ‘돼지’로, 미국인은 ‘개’로 표현된다. 이러한 둥물 의인화 콘셉트는 나치의 선전물에서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각각 쥐와 돼지로 표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등장인물은 의인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작품 속 당시 상황 묘사는 상당히 사실적이다. 이는 작가가 나치 치하의 탄압을 직접 경험한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Vladek Spiegelman)이 겪었던 일들을 거의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 만화 <내부자들> 단행본 1권. 출처= 네이버 책

<내부자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미생>으로 잘 알려진 윤태호 작가가 2012년 한겨레 매거진 ‘훅’에 연재했던 정치만화 웹툰이다. <내부자들>은 만화가 연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중단되면서 ‘외압’ 의혹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도 있었다. 

2015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져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재미있는 것은 웹툰 <내부자들>은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그 가치를 재조명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만화의 내용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 <내부자들> 개봉 이후 만화 속 내용과 거의 똑같은 정치권-기업-언론의 정경유착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일련의 사건들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명명되는 국정농단 사건의 흑막이 드러나는 시발점이 됐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윤태호 작가는 “만화의 모든 내용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관과 인물이었다”면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서 원작자인 나도 소름이 돋았다”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대형 언론사 논설위원의 “민중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대사를 한 정치인이 비공식적 자리에서 실제로 언급한 사건은 정치권력 조직의 부패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만화 속에 녹아있는 정치 서사 구조에 대해 경기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권동현 교수는 "만화는 인간의 상상, 그리고 우리 세대가 직면한 현실을 하나의 소재로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콘텐츠"라며 "대중적 관심사지만 마치 금단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정치' 담론을 만화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정치를 소재로 한 수많은 명작 만화들이 탄생했고, 독자들은 그 작품들로 인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열광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