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Otaku, 御宅]: 초기에는 ‘애니메이션, SF영화 등 특정 취미·사물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고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이라는 부정적 뜻으로 쓰임.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점차 의미가 확대돼 ‘특정 취미에 강한 사람’, 단순 팬, 마니아 수준을 넘어선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긍정적 의미를 포괄. 

 

필자 주변에 있는 노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노총각’ 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편견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맞다. 편견으로 인해 피해받은 ‘노총각’의 이야기 이다. 

이 노총각은 허우대도 멀쩡하고, 국내 유수의 명문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도 번듯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실 회사 내부에서는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다지 좋지 못한 평판을 얻고 있다. 그래서인지 업무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주변에서 별로 환영을 못 받는 적이 많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날, 회사에서 택배를 받게 됐고 우연하게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된 그 택배의 내용물을 보고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택배의 내용물은 바로 100만 원을 호가하는 건담 프라모델이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남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 직원의 소문은 입을 지나면 지날수록 과장되어 전파됐고 결국, 그 단 하나의 사건 이후로 그 노총각에겐 ‘오타쿠’라는 별명이 생기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가 정해둔 정답지 같은 행동 양식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된다. 하지만 정작 그 행동 양식이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명목으로 희생당해 아웃사이더가 된 사람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thing)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아웃사이더’에서 바로 ‘오타쿠’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공식인 것처럼 일반화된 현상이다.

우리는 누군가 무언가에 과하게 몰입하면 그걸 보고 ‘정상이 아니다’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무언가가 좋은 건지, 어떤 건지 또는 과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건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일단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쓰레기 같은 고정관념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생기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과거 식민지 시대와 독재정권을 연달아 겪으면서 여러 세대에게 극단적 집단주의가 학습됐고, 그 고정관념이 DNA화 되어 지금의 세대까지도 물려받은 게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가만히 있어라!” “튀는 행동은 하지 마라!” 따위의 요구가 매우 일반적이고 때로는 친숙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누군가를 ‘오타쿠’ 라고 부르기 전에, 일본에서 온 ‘오타쿠’라는 단어의 뜻까지는 우리가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더라도, 왜 오타쿠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들이 진짜 부정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인지는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왜 우리는 남과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기본적인 삶은 물론, 주관적인 가치관까지도 그 준거를 우리가 속한 ‘사회’에 두고 살아간다. 내가 사는 것에 대한 의미나, 내가 꿈꾸고자 하는 것의 의미도 나 스스로가 아니라 일반화된 타자의 눈에서 점검하고 있다. 즉 내가 하는 행동이 옳고 그른지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회’가 인정을 해 주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타쿠들의 삶은 어떨까? 흔히 우리가 멋모르고 상상하는 대로 찌질하고 외로운 이방인들일까. 하지만 편견을 버리고 조금만 더 자세히 그들의 삶을 보게 된다면, 그 실체를 마주하고는 나 자신이 절망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행한 건 오타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일반적으로 오타쿠적 기질 이외에도 사회성이나 사교성 등이 결여됐다고 하는데, 그 수준이 사회악적인 정도가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어느 분야에서든 결여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오타쿠적인 기질만 놓고 본다면, 사실 우리는 우리가 오타쿠라고 부르는 사람들보다도 더 불행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그저 하루살이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타쿠들은 그래도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에서 인생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걸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올인한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이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 결단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즉 오타쿠는 한 분야에 열중한다는 점에서 내가 본받을점이 분명히 있는 사람들이 것이다. 

당신은 어떤 누구에게라도 본 받을 점이 있는 사람인가? 또는 지금 당신은 어떠한 곳에 열정을 쏟고 있는가? 오타쿠가 아닌 이상 이 질문에 대부분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당신은 열정을 쏟을 곳 하나 없는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타쿠의 ‘덕질’을 두고 시간과 돈 낭비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은 얼마나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가? 우리는 남는 시간에 쓸데 없는 짓 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위해 투자한다고들 하지만 과연 그 투자의 ROI는 어느정도라고 예측되는가? 오타쿠들은 남는 시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면서 흥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까지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일고 있는 당신, 혹시 오타쿠처럼 현재를 즐기고 재미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는지. 이제는 남의 시선을 두려워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미쳐보는 건 어떨까. 

요즘은 ‘일코’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바로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이다. 오타쿠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오타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소에 남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척 감추는 사람들을 말한다. 어찌 보면 오타쿠와 일코는 똑같은 사람이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 거기서 행복과 에너지를 얻어, 또 다른 새로운 내일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행복한 오타쿠’, ‘당당한 일코’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노총각 사연을 이어서 마무리를 하자면, 그 노총각과 조금이라도 깊이 있는 대화를 해본 사람은 “그 사람은 천재인 듯” 이라고 말한다. 비록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그가 좀 어설프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가 올인하고 있는 해당 분야의 관련 모임에서 만났다면, 그는 거의 신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는 그 분야에 있어 지식과 경험, 식견 등에 있어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타쿠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이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타쿠뿐만 아니라, 하나의 소우주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그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그에 대해 단정을 짓는 것은 거의 테러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중요성과 존엄성에 대해 더 인정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힘에 밀려 개인이 희생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도 결국은 개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귀하고 원대한 공동체의 이상과 방향이라도, 개인주의적인 주체성과 능동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건강한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과 AI의 등장으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가 날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더욱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