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은 본토와 이미 일본이 점유하고 있는 아마미 군도 이외의 구메지마 군도 같은 곳에서 사람 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를 거둠으로써 일본의 조공을 감당하겠다는 희한한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두세를 내지 않으면 아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으로 부터 당하는 수탈을 일본과 맞서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고혈을 짜서 갖다 바치면서라도 자신들의 권력은 유지해야 한다는 지극히 매국적인 발상이었지만, 백성들은 감히 항거할 생각조차 못했다. 오히려 가혹하기 그지없는 인두세를 조금이라도 줄여 볼 욕심에 사람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 섬 한가운데로 사람들을 모이라는 소집령을 내려놓고 일정한 사람이 모이고 난 후에 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여 버리거나,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한 뒤 아이를 가지면 강제로 낙태를 시키는 등 온갖 반인륜적인 행태를 스스로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미 군도 이남의 류큐제도 내에서, 인두세를 걷어가면서라도 유지하려던 류큐 왕국의 통치조차 일본은 그냥 두고 보지를 못했다. 류큐의 고혈을 짬으로써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랐지만 무너져 내리지 않자, 메이지 유신에 의한 신정부는 일본의 폐번치현을 앞세워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시키고 '유구국 중산왕' 상태(尚泰)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강제로 임명해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상태는 이런 조치가 내려졌던 말든 상관하지 않고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다. 자신은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그런 류큐를 어떻게 하든지 정벌하고 싶었지만, 국내 사정도 사정인데다가 청나라 눈치가 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대만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이라는 것을 앞세워 속국의 국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진상을 규명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서 1874년 대만에 출병한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영토인 대만에 일본군이 상륙한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항의 하면서도 류큐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런 청나라의 모습을 본 일본은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적절한 시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청나라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류큐국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한 원성이 점점 높아만 가니 일본이 원하는 대로 류큐를 병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류큐의 정치 행정조직은 수리왕부라고 부르며, 수리왕부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 결정은 평정소(評定所)가 맡아서 했다. 그곳의 수장은 '섭정'이라고 불리며, '삼사관'이라고 호칭하는 세 명의 실력자가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일본은 평정소의 삼사관을 매수하는 한편 500명의 군사를 치안을 유지한다는 구실을 붙여 수리성을 포위하게 한다. 그리고 유구국 중산왕인 상태로 하여금 합병문서에 도장을 찍도록 목숨을 위협하며 강요하여 도장을 찍게 한 후 그를 도쿄로 압송함과 동시에 후작이라는 직책을 내린다.

결국 류큐 왕국은 1879년 일본에 복속되어 류큐제도는 오키나와제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류큐제도에서 가장 큰 섬은 오키나와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오키나와라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하면서 류큐의 무고한 백성들에게는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이 선포되었고, 급기야는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류큐인들이 소유한 땅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