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도쿄에 위치한 산업혁신기구 본사. 사진=위키커먼스

최근 일본 도시바 메모리사업 인수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있다. 일본 관민투자 펀드 '산업혁신기구(The Innovation Network Corporation of Japan, INCJ)'다. 이 기구는 지난달 21일 도시바 메모리사업의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일·미·한 컨소시엄을 주도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이어 코니카미놀타가 미국 엠브리제네틱스 인수에 참여하면서, 산업혁신기구에 인수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 기구가 다시 주목받았다.  코니카미놀타의 사업 다각화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 암 진단과 치료에 따르는 의료비 증가 억제에도 기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업혁신기구는 일본 산업 재편을 지원사격하는 동시에 일본 기업들의 역량을 키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가 막강한 자본력 배경 

산업혁신기구(INCJ)는 일본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09년에 설립된 정부 주도의 관민펀드 운영 기구다.

시가 토시유키(志賀俊之) 회장겸 CEO가 운영하는 이 기구는 환경, 생명공학 등 일본이 강점을 가진 분야의 첨단 기술과 특허 산업화를 지원하는 것이 설립 취지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보도에 따르면 산업혁신기구는 일본 정부가 전체 자본금 3000억1000만엔(약 3조원) 가운데 95% 이상인 2860억엔(약 2조9000억원)을 출자했다. 나머지 140억엔중 일본정책투자은행이 15억엔을, 일본내 26개 기업이 각각 5억엔씩 출자했다. 그리고 1000만엔은 개인 2명이 출자했다. 혁신기구에 출자한 주요 기업은 캐논, 샤프, 소니, 도시바, 도요타자동차, 파나소닉, 히타치, 미쓰비시중공업 등이다.

산업혁신기구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금 및 회사채 발행을 통해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히 차입금과 회사채 조달에 대해서는 법률 등에 근거해 일본 정부 보증이 붙어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정부 보증은 최대 1조8000억엔(약 18조3200억원)까지 가능하다. 이 때문에 산업혁신기구 2조억엔까지는 투자가 가능한 자본력을 갖게됐다.

산업혁신기구는 일본의 '산업경쟁력강화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2012년 12월 아베 정권이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면 세금 혜택을 주는 취지로 이 법을 제정했다. 사업재편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꾀하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국내의 일본 법률 전문가는 “산업경쟁력강화법은 고용안정을 배려하면서 한계기업 구조조정 수단 등으로도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며 “제정 당시 획기적인 법안으로 우리나라 학계 연구대상이었으며, 원샷법에 비해 실효성과 법적 안정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일본 산업혁신 선두주자,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 눈길

산업혁신기구는 초기에 첨단기술과 특허의 사업화를 지원하는 목적이었으나, 이후 일본 산업 전반적인 변화 흐름에 지원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분야를 불문하고 많은 산업군에 출자하며 일본 경제 재건에 일정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산업혁신기구의 주요 투자 분야는 ▲기업과 기술대학이 가진 첨단기술과 투자 특허의 사업화 ▲성장이 예상되지만, 자금력이 부족한 기업 ▲기업의 유망한 사업부문의 재편 등이다. 가능성 있는 분야는 어디든 투자한다는 얘기다.

혁신기구 투자 영역은 소재·화학, 소비재·소매, 전자기기, 생활과학, 산업기계, IT·비즈니스서비스·콘텐츠, 에너지, 지적재산, 수송·자동차, 인프라 등이다. 자본투자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민관펀드가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지난 5월을 기준으로 이 기구는 116개 기업에 총 9869억엔(약 10조446억원)을 투자한 상태다. AI(인공지능) 기술개발 기업을 포함해 생명공학,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시행하고 있다.

투자 결정은 관계법에 따라 혁신기구 내에 설치된 산업혁신위원회에서 수행한다. 기본적으로는 대상 회사에 출자해서 주식을 취득한 뒤, 대상 회사의 기업 가치를 높인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보유 주식을 매각해 투자금을 회수하게 된다.

산업혁신기구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표방하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해당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편, 내부 자원을 외부와 공유하면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모토로 기업과 대학, 벤처 등 다양한 산업현장 사이에서 기술과 인재를 모아 혁신적인 기술의 상용화를 지원하고 있다.

국내 투자금융업계 관계자는 “국내 산업재생관련 정부계 펀드나 관민 펀드 도입을 고려한다면 모티브가 될 만한 모델”이라며 “민간펀드나 시장과의 마찰을 줄이고 정책목표와 수익성 모두 추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일본 재팬디스플레이 로고. 사진=위키커먼스

'재팬디스플레이' 설립에 주도적 역할

산업혁신기구의 활약은 일반 IT산업계 재건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산업혁신기구가 2000억엔을 출자해 소니, 히타치, 도시바 등 3사의 LCD패널 사업을 통합해 2012년에 재팬디스플레이(JDI)를 출범시킨 것이 대표적. 산업혁신기구는 도시바 메모리사업 인수전에 앞서 샤프와 같은 골칫덩어리를 직접 재건시키는 작업을 추진하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혁신기구의 투자 결정에 극적으로 회생하는 기업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실기업도 많았다. 

혁신기구가 지난해 3월 발표한 결산에 따르면 영업수익 752억엔(약 7640억원), 영업손실 421억엔, 순손실 477억엔을 기록했다. 이 결산 결과 기구가 경영 위기에 빠진 부실 회사를 연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 문제는 산업혁신기구의 최대 실적으로 일컫는 재팬디스플레이 CEO 발언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일본의 재팬디스플레이가 일시적인 운전 자금 증가로 인해 현금이 부족하다는뉴스가 보도됐을 당시, 재팬디스플레이 CEO인 혼마 미쓰루의 결산회의 발언이 문제였다.

혼마 CEO는 주주들에게 "INCJ의 지원은 문제가 없다"라며 자신있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는 재팬디스플레이가 자력으로 살아날 생각보다 대주주인 산업혁신기구의 도움으로 연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어서  공분을 샀다.

이에 대해 국내 투자금융업계 관계자는 "산업혁신기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국민의 세금을 이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관민펀드 도입 가능한가

일본은 지난 2003년 최초로 정부계 펀드인 산업재생지원기구(IRCJ, 2007년 6월 업무종료 해산)한 후 2008년 '향후 산업 투자의 방향에 대하여'라는 지침을 제정했다. 산업혁신기구는 이에 따라 설립된 다양한 관민펀드 중 하나다.

일본은 2009년에는 `기업재생기구지법`에 따라 기업재생지원기구도 함께 설립했는데, 이 기구는 유용한 경영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과도한 채무를 지고 있는 중소기업의 사업재생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였다. 

산업혁신기구와 기업재생지원기구가 설립됨에 따라 일본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구조조정 전문가를 육성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재생전문가도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이들 기구의 활동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점차 바뀌었다. 도산에 빠진 기업은 청산형(우리나라의 파산에 해당)으로 전환하기 보다는, 재생형(우리나라 기업회생에 해당)으로 정부기관이 돌봐야 한다는 인식으로 돌아섰다. 이런 인식의 전환으로 기업재생 금융기법이 확대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들 기구를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시켜, 민간 자본운용에 정치적 압력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나라는 왜 도입하지 않았을까

이런 혁신적인 민관 산업재건 기구 모델을 우리나라가 도입한다면 어떨까. 전문가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많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한결같이 지적했다.

유관영 전 산업연구원 박사는 "산업혁신기구의 기반이 되는 사업혁신법(1990년 제정) 준비과정에서 WTO(세계무역기구) 보조금 규정이나 경쟁정책 저촉 여부를 둘러싸고 일본에서 논란이 많았다"면서 "우리나라가 이같은 민관펀드를 도입할 경우 WTO 보조금 규정과 관련해 허용보조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원대상을 특정 산업이나 기업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또 지원방식은 저리의 융자나 보조금 지급이 아니라 출자 형태로 구성해야 한다”며 “WTO 규정에 저촉 여부에 관해 보다 정밀한 검토와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직접지원보단 간접지원 형태, 특정한 산업이나 기업이 아닌 일반 규정에 따라야 한다는 한다는 설명이다. 

현석 자본시장위원회 연구위원도 "산업재생기구와 같은 사업재생관련 정부계 펀드나 민관펀드 도입을 시도할 경우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민관펀드 도입시 시장과 마찰을 줄이고 정책목표와 수익성을 모두 추구할 수 있도록 펀드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발표한 '기업구조조정의 한계와 향후 정책과제'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펀드 신설은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는 마중물 효과 등 정책적 의의가 존재하는 영역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펀드 존속에 기한(일몰조항)을 정하되, 개별 투자안건 별로 시간 축을 설정해 종료 후에는 민간에게 적절하게 넘기는 것을 전제로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비쳤다.

현석 연구위원은 "펀드의 투자 결정에 대해 정부가 투명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제3자 기관의 심사 또는 감시·견제 구조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