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원래 류큐국의 영토다.

류큐국은 아마미, 미야코, 야에야마, 오키나와 등으로 이루어진 섬들을 지칭하는 류큐제도에서 번성하고 있던 류큐왕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전신인 조선시대 성종 2년(1471) 신숙주 선생의 <해동제국기>에 유구국(琉球國)으로 기록된 나라다. 류큐국의 역사는 사료가 전해져 오는 12세기경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있던 것을 보면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 그곳에 살고 있던 지방 호족들이 각기 통치를 하는 상태인 고대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류큐국의 건국은 1429년 제1 상씨(尚氏) 왕조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 상파지 왕(尚巴志王)이 그 당시 류큐제도의 각처에서 서로 왕임을 자처하는 지방 호족들이 왕국으로 세운 중산(中山), 북산(北山), 남산(南山)의 삼산(三山)을 통일함으로써 건국 된 것이다. 당시 류큐의 왕은 명나라로부터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이라고 책봉 받았으며 조선 등 다른 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이 칭호를 썼다.

그러나 건국된 류큐왕국은 아직 지방호족들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하여 항상 불안한 정국을 이끌어 가던 중에 1470년 궁정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로인해 제2 상씨 왕조가 성립되고1477년 즉위한 상진(尚真)은 확실한 중앙집권제의 토대를 만들어 집권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치를 펴면서 류큐왕국은 번성기를 맞이한다.

그들은 지리적인 위치가 다른 나라와 교역하기 좋은 해상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명나라, 조선, 일본 등 자신보다 북쪽에 자리 잡은 나라들은 물론 인도네시아 자바 섬을 비롯하여 동남아의 각지에까지 사절을 보내고 상인들을 보내서 활발한 교역 활동을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는 한 편, 그 당시의 서구열강에 해당하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고 그들이 동양으로 밀고 들어와서 자신들의 교역권을 펼치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그런 기회를 놓칠 일본인들이 아니다.

1609년, 규슈 남단의 사쓰마 번이 류큐를 침공하여 류큐의 수도 수리성을 점령함으로써 자신들과 조공무역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지배 제도의 특성상 사쓰마 번이 류큐를 침공했더라도 형식상으로는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가문과 조공무역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막부는 류큐국을 점령한 공을 인정해서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이 류큐국을 통제하도록 했다. 류큐는 실질적으로는 2중으로 통제를 받는, 말하자면 사쓰마 번과 에도막부의 2중 통제를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쓰마 번은 아마미 제도는 자신들이 직접 통치하고 아마미 제도 이남은 류큐국이 통치하도록 함으로써, 여차하면 재침공할 의사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해상교역을 통해서 번창해 가던 류큐 왕국은 졸지에 에도 막부의 일본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는 류큐국이다 보니 결국은 2중, 3중으로 부담을 지고 조공무역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서양세력의 등장과 함께 주변국가와의 교역이 감소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수시로 조공을 요구해 오는 일본과 사쓰마 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사신을 파견하다보니 류큐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류큐 왕국은 궁여지책으로 안을 내놓았는데, 그 안이라는 것이 일본과 타협하고 일본에 맞서서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