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를 둘러싼 각자의 충돌이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과연 우선협상대상자는 누가 될 것인가?'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의 브로드컴과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베인캐피털과 연합한 SK하이닉스와 폭스콘, 여기에 웨스턴디지털까지 인수전에 뛰어든 상태에서 일각에서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6월 말은 되어야 윤곽을 보일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출처=픽사베이

치열한 5파전...브로드컴 승기 잡았다?
지난달 19일 도시바 인수 2차 입찰이 종료된 가운데 주요 후보군은 미국의 브로드컴과 KKR, 베인캐피털과 연합한 SK하이닉스와 폭스콘 등 4파전으로 정리된 바 있다.

소위 '2강(强) 2약(弱)'구도라는 것이 업계의 평가였다. 2강에는 KKR과 브로드컴, 2약에는 베인캐피털-SK하이닉스와 폭스콘이 해당된다.

KKR은 일본 민관펀드 산업혁신기구(INCJ)가 이끌고 있는 '미일 컨소시엄'과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를 밟았다는 설명이다. 입찰가로 약 18조2000억원을 제시한 가운데 아시아 기업이 아닌 미국 기업이 도시바를 인수하는 방향을 선호하는 일본 정부의 의도와도 부합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브로드컴은 약22조3000억원의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역시 미국 기업이라는 점이 어필하는 분위기다. 다만 미일 컨소시엄과 협력한 KKR에 비해서는 다소 열세라는 말이 나왔다.

베인캐피털과 연합한 SK하이닉스는 일단 다크호스로 분류된다. 최태원 회장이 출국금지 해제 직후 일본으로 날아가 도시바 임원을 만나는 등 나름의 정성을 기울였으나 뚜렷한 반등요인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양사가 10조억원에 불과한 입찰가를 제시했다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는 KKR과 브로드컴에 비해 존재감 자체가 강렬하지 못하다.

다만 회심의 카드는 있다. 단순한 입찰금액의 가치를 넘어 도시바와 상생할 수 있는 역제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베인캐피털이 도시바 현 경영진이 인수에 참여하는 MBO(Management Buy Out) 방식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도시바 반도체 지분 51%를 확보하는 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하면 SK하이닉스가 자금을 지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하면 나머지 49%를 도시바 경영진에 보장할 수 있어 반독점법 위반 논란도 피해갈 수 있으며 아시아 기업의 인수를 우려하는 일본 정부의 마음도 일정정도 돌릴 수 있다.

최근에는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 동맹진영에 일본 오릭스가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오릭스와 재무적투자자 연합을 구성하는 방법론이다.

마지막으로 폭스콘. 무려 30조3600억원의 입찰가를 제시해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으나 현 상황에서 순조로운 인수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일본 디스플레이의 자존심인 샤프를 인수한 상태에서 대만 폭스콘에 대한 현지의 비토정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스콘의 인수열정만큼은 강렬하다. 궈타이밍 회장은 인수전 초기부터 공개적으로 도시바 인수에 대한 공격적인 스탠스를 보여준 바 있으며, 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불발됐지만 SK하이닉스와 자국의 TSMC 등과 차례로 접촉하며 협력기회를 모색하기도 했다. 지난 5일 궈타이밍 회장은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애플과 아마존도 우리와 함께 출자할 것"이라는 말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2차 예비 입찰이 끝날 당시의 상황이다. 하지만 웨스턴디지털이 변수로 부상하며 판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햇다.

원래 웨스턴디지털은 도시바 인수전의 가장 유력한 후보군으로 분류된 바 있다. 일본 시가현에서 도시바와 합장공장을 설립해 낸드플래시에서 SSD(Solid State Drive)에 이르는 막강한 라인업을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매개로 웨스턴디지털은 자신들이 인수에 최적화된 사업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미국 기업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어필하며 판을 주도했다.

하지만 막상 인수전이 시작되자 웨스턴디지털은 도시바와 날을 세우며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심각한 원전손실을 메우기 위해 도시바가 메모리 사업부 매각 금액을 올리는 상황에서 다양한 기업의 경쟁을 유도하자 웨스턴디지털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셈이다.

결국 웨스턴디지털은 지난 4월9일 도시바 이사회에 서한을 보내 "합작 계약에서 상대방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지분을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며 "독점 교섭권을 주지 않으면 법적인 대응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하기도 했다. 웨스턴디지털과 도시바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며 "우리(웨스턴디지털)의 의사가 도시바 매각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는 공세에 나선 셈이다.

문제는 도시바도 기업 공중분해 위기에 직면한 상태라 동업자의 주장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는 점. 도시바는 웨스턴디지털의 서한을 받는 즉시 독점교섭권을 인정할 수 없으며, 합작공장의 웨스턴디지털 기술자들을 추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역공에 나섰다. 그러자 웨스턴디지털이 국제중재재판소에 매각 절차 중단을 요청하며 재차 신경전을 벌이는 등 양 사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지난달 2차 입찰에 웨스턴디지털이 이름을 올리지 못한 배경이다.

그러나 지난달 24일 스티브 밀리건 웨스턴디지털 CEO가 일본으로 찾아와 츠나카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과 협상을 벌이며 양 사의 신경전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도시바가 실제 웨스턴디지털 기술자들을 합작공장에서 추방하지 않았고, 이후 밀리건 CEO가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 주식을 거래은행들이 담보로 설정하는 데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선에서 갈등이 봉합됐다는 후문이다.

이렇게 돌아가면 웨스턴디지털이 단숨에 도시바 인수의 유력한 후보가 된다. 물론 웨스턴디지털이 제시한 인수금액이 낮다는 약점은 있으나, 이미 인수가 조정에 나서는 한편 KKR과 연합한 INCJ과 접촉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다만 도시바가 합작공장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최근 보여, 양 사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일 일본 아사히 신문이 도시바 인수전 우선협상대상자으로 브로드컴이 선정되었다고 보도하자 판은 또 한 번 출렁였다. 폭스콘에 비해서는 낮지만 다른 경쟁자와 비교해 가장 많은 액수를 쓴 것으로 알려진 브로드컴이 인수전 최종승자의 자리에 한 발 다가선 셈이다.

현재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도시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브로드컴이 유력한 인수 후보군이었기 때문에 경쟁자들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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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드플래시 시장이 뭐길래
글로벌 기업들은 왜 도시바를 원하고 있을까? 나아가 이들이 도시바 낸드플래시 경쟁력을 확보하면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비해 약 25%에 불과한 작은 시장이지만, 최근 초연결 시대를 맞아 몸값이 급상승하고 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핵심이던 D램보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는 낸드플래시 수요가 커지는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자체가 소위 슈퍼 사이클이라는 장기호황의 관문으로 들어선 가운데 조만간 낸드플래시 시장 규모가 D램을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낸드플래시 매출은 전분기 대비 0.4% 감소한 약 13조3500억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1분기(약 9조437억원)와 비교하면 무려 47.7%나 급증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낸드플래시 매출 증가는 경기회복과 유가 반등으로 인해 브라질 러시아 등 이머징 국가의 IT 수요 증가와 전 세계 IT 세트 공장인 중국에서 재고를 흡수한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심지어 칩(Chip)의 평균 계약 단가도 작년 4분기 대비 최대 25%나 널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모바일 시대를 넘어 초연결 생태계 시대가 도래하며 저장장치 수요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가 흔하게 마주하는 스마트폰을 비롯해 인공지능 기기 등 모든 ICT 전자계열 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가고, 데이터 저장에 있어 낸드플래시가 각광을 받고 있다. 각 기업들이 도시바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게다가 도시바의 경우 낸드플래시 원천 기술력을 확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록 올해 1분기 글로벌 매출 점유율 기준 웨스턴디지털에 2위를 내주며 3위로 주저앉았으나 SSD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라인업을 보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때 도시바는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 최강자인 삼성전자와 1위를 다툴 정도로 나름의 저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만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고 가정해도 '독이 든 성배'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와 눈길을 끈다. 특히 SK하이닉스의 경우 D램에서는 삼성전자에 이어 2위의 자리를 굳히고 있으나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5위에 불과하다. 올해 1분기 점유율이 11%에 불과한 상태에서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고 당장 '점프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는 평가다.

물론 SK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수직계열화에 나서는 한편 낸드플래시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으나, 도시바 인수가 곧 낸드플래시 판 뒤집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는 약간 어설프다.

폭스콘도 마찬가지다. 고성능 반도체 노하우가 전무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낸드플래시 기술력을 체화하는 방식이 '만사형통'이라는 접근은 위험하다는 말이 나온다. 브로드컴도 도시바 인수에 성공하면 무선 네트워크 및 보안, 전력 칩 인프라를 바탕으로 셋톱박스 및 TV 부품 등 주요 시장에서 두각을 보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대단위 전략은 부재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KKR은 사모펀드의 특성상 낸드플래시 시장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토정서가 뚜렷하기 때문에, 실제 인수에 성공할 경우 업계로부터 필요 이상의 전방위적 견제에 시달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