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쉬운 업무가 어디 있을까? 얼마 전 TV에서 전국에서 짬뽕으로 그 맛을 알아주는 유명한 장인의 일과에 대해 방영한 적이 있었다. 요즘은 고급 중식요리 전문점도 많지만 낡고 허름한 그런 집들을 우리는 그냥 흔히 중국집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그저 흔한 중국집 식당 주인 아저씨의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이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식당을 감싸고 길게 늘어선 줄, 짬뽕을 먹으면서 감동하는 얼굴들, 그리고 70대 장인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더 놀라운 점은 짬뽕면을 뽑기 위해 장인의 하루는 전날 밤부터 일과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고된 하루의 영업을 마친 뒤 겨우 세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밤 11시반이면 어김없이 500인분의 면을 위해 반죽하는 모습에서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파스 몇 장으로 무릎 통증을 벗 삼아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세상 어떤 장인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 이런 모습에서 주위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많은 직장인들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일이 가장 어려운 업무 중의 하나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팀은 내부 직원 기피 1순위 부서

2010년 무렵이었다. 경력 충원 얘기를 꺼냈더니 외부 경력 충원도 좋지만 회사 내에도 똑똑한 인재들이 많다고 사내 리크루팅 지시가 떨어졌다. 자칭 타칭 사내 각 부서 에이스라고 평가 받는 몇몇 후배들을 염두에 두고 물밑 작업에 돌입했다. 주위의 평도 듣고, 인사팀에 가서 프로필을 보기도 했다.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 했기에 평소 동료들에게 커뮤니케이션 일에 대해 호감을 비친 적이 있는지도 파악했다. 꼬드기거나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후배 한 명을 점 찍고, 조용히 의사를 떠봤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했고, 영업부에서 겸손하기로 소문난 후배여서 딱이라 싶었다. 그 자리에서 결론내지 않고 다시 며칠 동안 충분히 고민을 하게 했다. 사흘 뒤에 답을 들었다. 오케이였다. 행정 절차를 거쳐 보직을 변경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실패였다. 불과 7개월만에 후배는 원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곧 대리가 될 그가 해야 할 일은 대단한 뭔가가 아니었다. 팀 분위기부터 익히며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감을 잡아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위기 상황이어서 긴장의 연속인데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예상치 못한 전쟁같은 상황들이 툭툭 불거지는 통에 무척이나 난감해 했다. 걸핏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싫은 소리 듣기 일쑤인데다 밖에서는 거절당하면서도 부탁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접대에 있어서도 영업팀원으로서의 접대와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접대자리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임직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각종 이벤트, 사보 취재, 봉사 활동은 물론, 온오프라인 제작물, 의전, 임직원 의견 수렴에 이르기까지 기업문화 개선을 위해서 사소한 것부터 큰 일까지 매니징 해 나가야 하는 일들이 종내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회사 전체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팀 자존감은 버려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던 것 같다.

계절이 세 번도 채 바뀌기 전 어느 날 ‘드릴 말씀’이 있다며 면담을 요청해왔다. 경험상 후배가 진지한 얼굴로 시간을 내 달라고 할 때는 뒷덜미에서 한줄기 스쳐 지나가는 그 느낌이 어긋나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례는 해외투자, 기획, 인사, 총무 등등 일 잘 하기로 잔뼈가 굵은 선배가 있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고생도 많이 해서 특별 진급을 2번이나 해서 상무이사가 되었는데, 동기들은 과장이나 차장도 있었고 대개 팀장 정도였다. 겸직으로 커뮤니케이션까지 맡게 되었다. 그런데 농담 조금 보태서 40대 후반까지 평생 생긴 주름과 흰머리보다 커뮤니케이션 일을 한 2년동안 늘어난 주름과 흰머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의 이력은 회사 내에서 제일 화려했다. 국내 최초 선발대로 중국 북경과 상해 지역에 생산공장 2곳의 투자사업을 진행했다. 만만하게 볼 중국이 아니어서 5년간 지지부진 하던 투자사업을 손실 없이 철수시키고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수한 생산법인으로 중국의 설비들을 이전했다. 대한민국 기업으로서 거의 유일한 아프리카 생산기지를 구축한 레전드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도 ‘그때까지 해왔던 그 어떤 일보다 어렵다’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기사는 물론 CEO 인사말, 연설문 단어 하나 선택하는 데에도 고민을 거듭해야 했고, 서로 다른 성향, 관심, 성격, 취향의 수많은 기자들과 씨름해야 했다.

한번은 사보에 들어갈 칼럼을 내가 썼다. ‘그 많던 맥도널드의 황금아치는 다 어디로 가 버렸나?’는 주제로 당시 출판된 잭디시 세스가 지은 ‘배드 해빗’을 읽고 성공한 기업의 7가지 자기파괴 습관을 꼬집어 쓴 글이었다.

 

“맥도널드라고 기업 브랜드명을 직접 표기해도 될까?”

“칼럼인데 이 정도 표기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쪽도 기업이고 우리도 기업인데 생각은 해 줘야지.”

 

한참을 대립하다 결국에는 익명으로 처리했다. 그 회사에 피해라도 갈까 싶었고, 괜한 곤란한 일을 막자는 우려에서 였다. 이렇게 작은 글, 포탈 기사 하나, 인용문 같은 경우에도 저작권이나 법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취재 문의만 해도 엄청난 부담인데, 기업 관련 팩트가 적나라하게 나가는 것은 곧 더 큰 위기를 자초한다. 기자들이 예고없이 새벽이나 밤늦게 연락할 수도 있는 것처럼 경영진이 커뮤니케이션 담당을 찾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10년만 하라, 그러면 제대로 감이 온다

윗선에서 급하게 찾는다는 것은 문제가 터졌다는 것이다. 좋은 일로는 급하게 찾지 않는다. 궁금할 때도 급히 찾는다. 그 외엔 없다. 커뮤니케이션 일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경기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게 커뮤니케이션 업무다. 그래서 그 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늘 강조했다.

나도 초기엔 이 일을 왜 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 한 티는 나지 않는데, 욕 먹을 일은 무지 많은데다가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 속이다. 업무가 어느 정도 익숙해 진 것은 7년차 정도부터 였고, 10년차쯤 되었을 때에 ‘아!’하는 느낌이 왔다. 13년차일 때는 ‘이 정도야’하는 생각도 했는데, 15년차가 넘어서니까 그게 아니었다 싶었다. 그저 초심 또 초심으로 해 나갈 뿐이다.

순탄해 보이는 삶도 직접 그 속에 들어가서 들어보면 온갖 애환이 녹아 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는 거의 매일 전쟁 상황이 반복된다. 기자도 그렇지만 커뮤니케이터들도 하루살이처럼 산다. 후배들에게 일이 일찍 끝나거나 모처럼 홀가분한 오후가 되면 “편한 맘으로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 최대한 일찍 퇴근하라”고 권한다. 평온한 저녁이 최대의 보상이다.

언론인들의 하루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오래 일해 왔고 경험이 있기에 미리 낌새를 챈다. 사전에 돌아가는 여론과 정보에 대해 파악해 왔고, 내부 커뮤니케이션도 공고히 해 왔기에 미리미리 협의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사가 터지고 난 뒤에 상황 파악하랴 진화하랴 진땀 빼거나 아니면 사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포탈사이트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검색해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한 말이다. 커뮤니케이터로 살아오면서 이 말처럼 공감 가는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십 년을 한결같이 해오면서도 여전히 어렵고, 욕 먹기 일쑤인 데다 작은 결과 하나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야 조금 티가 난다.  

김성근 감독은 자서전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우승은 덤’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커뮤니케이터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요 가장 고차원적인 일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그게 내부가 되었든 외부가 되었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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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만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없다.

2.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집중하라.

3. 적어도 10년은 해봐야 감을 잡을 수 있다. 그 전에 속단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