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경제가 뜬다고 합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비전은 익히 잘 알려져있고, 최근 소프트뱅크가 승차공유 서비스인 그랩과 디디추싱에 투자를 단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공유경제에 시선을 돌리는 장면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양회를 통해 공유경제가 화두로 부상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먼저 공유경제 기업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과연 잘 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우버의 경우 몸집은 커졌지만 그에 비하면 내실이 약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공유경제 기업이냐?'

공유경제라는 단어를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8년 미국 하버드대 법대 로런스 레식 교수에 의해 처음 사용된 말' 여기에 이런 부분도 보입니다. '대량생산체제의 소유 개념과 대비된다'는 설명. 맞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로렌스 레식 교수는 공유경제를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발견입니다. 그것도 '재'발견이에요.

깊숙히 들어가 보겠습니다. 공유경제의 핵심은 '공유'에 있습니다. '소유'가 아니죠. 그런데 공유의 뜻을 잘 살피면 '유휴재산의 공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체는?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 아닙니다.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정리하자면 공유경제는 로렌스 레식 교수의 주장을 빌려온다고 해도 '재화의 공유'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내밀한 지점에는 '소비의 방식'이라는 답을 발견할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고 계급제도가 시작된 후, 인류는 혁명이나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정해진 신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 지배층의 지배를 받아요. 문제는 재화의 절대치. 지배층이 90을 가져간다면 절대다수인 피지배층은 10을 가져갑니다.

여기서 고민이 나옵니다.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소비할 것인가? 우리 선조들은 두레와 향악 등으로 해결했어요. 한정된 재화를 가진 사람들이 재화의 시너지를 노리기 위해 서로의 잉여 노동력을 교환하는 방식이지요. 여기서 주체는?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과 활용하는 사람 모두지만 엄밀히 말하면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왜? 서로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레와 향악 등을 보자고요. "최씨네 집에 밭일이 있으니 모두 모여라!" 상황이 벌어지는 중심은 노동력의 소비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릅니다. 이후 인류는 민주주의의 재발견에 이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이제 한정된 재화로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계급은 사라졌으며, 노력에 따라 충분히 자신의 재산을 불릴 수 있게 되었어요. 굳이 한정된 재화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아도 불릴 수 있는 재산의 크기는 이론적으로 무한정입니다. 오로지 노력. 노력이면 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인류는 자본주의를 만나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심각한 착각이었어요.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체제를 끌어낸 상태에서, 오히려 계급제 이상의 견고한 시스템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혈통이 아닌, 돈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단어가 있죠? '헬조선'

이는 글로벌 경제 위기가 벌어지던 2000년대 후반 정점으로 달려갑니다. 크게 보면 미국 대선에서 불었던 샌더스 열풍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유경제의 재발견이 이뤄집니다. 로렌스 레식 교수의 손에서 말이죠. "자본주의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 대량생산체제에 따른 소유의 개념으로는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기 어렵다. 이대로는 곤란해. 이제 재화를 공유해야해" 다음 단계가 이어집니다. "모바일 기업이 O2O 방향성으로 플랫폼을 자임, 이를 바탕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해 쓸데없이 낭비되는 재화를 효과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이 어떨까?" 공유경제 기업의 탄생입니다.

▲ 공유경제는 다양한 지점에 사용될 수 있다. 출처=위키미디어

지금의 공유경제 기업들, 모조리 온디맨드 기업이다
하지만 또 문제가 생깁니다.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서문에서 알아봤지만 사실 공유경제는 소비의 방식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왜? 재화를 공유해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화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사업을 벌여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잘 소비하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버와 에어비앤비 등을 보겠습니다. 이들은 O2O 기업입니다. 다만 O2O라는 영역이 모바일을 품어도는 순간 거의 대부분의 IT 기업에 해당되기 때문에 범위를 좁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플랫폼 사업자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뭔가 부족해요. 무엇일까요? 익숙한 캐치 프라이즈가 연상됩니다. "손님은 왕이다!" 온디맨드 기업의 탄생입니다.

맞습니다. 지금 나오고 있는 소위 공유경제 기업이라는 존재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은 사실 모조리 온디맨드 기업입니다. 수요에 맞춰 공급을 조절하는 방식을 공유경제의 탈로 위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세히 볼까요? 온디맨드 기업은 플랫폼 사업자로 활동하며 수요를 보고 공급을 맞춥니다. 수요자가 공급자가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말 그대로 수요가 일어나는 지점에 공급자를 동원하는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 사업자는 서서히 공급자의 '슈퍼갑'이 됩니다. 온디맨드가 비정규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며, 우버가 2009년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한 배경입니다.

또 질문해야 합니다. 소비의 방식인 공유경제를 플랫폼 사업자가 온디맨드로 작동시키면서 수요자와 공급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재화의 윤택한 활용"이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심지어 공유가 아닌 경제에 방점을 찍으면서요. 이들은 그냥 O2O의 기술발전으로 플랫폼 사업으로 온디맨드 방향성을 잡았을 뿐입니다.

즉 플랫폼 사업자가 개입하는 순간 소비의 방식인 공유경제는 크게 의미가 퇴색되지만, 이 부분은 백번양보해 넘어가 보자고요. 사실 지금의 소위 공유경제 기업을 보면 온디맨드의 방향성을 따지면서 '이윤 창출'에 나서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보가 불법은 아니죠. 다만 합리적 소비의 방식을 사업적, 마케팅적 수사로 갖다 붙이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리스크가 큽니다.

▲ 공유경제의 기본적 개념은 결국 열망. 각자의 니즈를 맞추는 것이며 중심에는 당연히 플랫폼 사업자가 있다. 출처=위키미디어

왜 리스크가 클까?
최근 유경준 통계청장은 공유경제 실태조사 계획에 대해 "지난해부터 개략적인 파악을 마쳤고, 오는 6월부터 조사에 들어가 연말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고 밝혔습니다. 무상거래는 제외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는 정정해야 합니다. 공유경제 기업이 아닌, 온디맨드 기업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도덕적, 법적으로 문제가 큰 것은 아닙니다.(있기는 있습니다. 우버를 둘러싼 택시기사의 항의와 각 국의 규제 등등을 살피면 법적인 문제가 있어요) 게다가 이런 반론도 나옵니다. '혁신의 기업 경영술이 아닌가!' 맞아요. 중국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전거의 오포나 모바이크를 봐라. 중국 양회를 봐라. 공유경제는 이제 대세다.

하지만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도 있습니다.

현재 공유경제 기업으로 불리는 온디맨드 기업들이 승승장구하는 배경에, 기술의 발전으로 한 사회의 재화가 크게 늘어났다가 '꺾이는 지점'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보입니다. 보겠습니다. 중국에서 소위 공유경제 기업들이 부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혁신의 기술이라서? 지엽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플랫폼 사업이 비단 공유경제 기업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경제가 성장하다가 '꺾이고 있기' 때문에, 주인을 순간적으로 잃은 재화들이 공공재로 여겨지며 이를 플랫폼 사업자가 온디맨드로 풀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런 상황을 고무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혼란과 부족함의 시대에 공유라는 통섭의 개념을 붙이는 것을 좋아할 이유는 없어요.

게다가 온디맨드는 비정규직 양산의 본산이에요. 지금 당장 플랫폼 기업, 온디맨드 기업은 성장하겠지만 그들은 점점 공급자의 슈퍼갑이 될 겁니다. 수요가 공급을 결정하는 순간, 이건 노동문화의 문제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공유경제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조리 온디맨드로 커밍아웃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재화의 공유? 지금은 재화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모든 경제방식이 철저하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점이 잘못된 관점이 공유경제라는 달콤한 마케팅에 눈이 멀어 자본주의의 폐혜를 해결하기는 커녕, 인류 경제 모델의 리스크로 작동할 여지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 시작은 노동시작이 될 겁니다. 가뜩이나 인공지능이니 뭐니 변수가 많은 가운데, 신기술로 무장한 마케팅적 수사가 존재할 수 없는 경제적 이윤을 창출한다니.

그런 이유로 냉정하게 논의를 하려면 공유경제와 온디맨드를 분리하고, 전자를 사회적 기업까지 허용하는 선에서 공동체적 관점으로 철저히 소비적 관점, 즉 문화적 관점으로 공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디맨드를 사업적, 경제적 이윤 창출의 개념으로 깊숙히 연구해야 합니다. 이 둘을 섞어버리는 순간 혼란이 오고,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연결에 따른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해 고민할 시간마저 빼앗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