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강노래, 70×48㎝, 2004

 

전체적인 인상이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필선은 그처럼 무심하다. 그렇다. 그는 필선이 만들어내는 어리숙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형태의 필선이 일회적인 묵필을 요구하는 문인화의 절지화에 쓰이면 그 같은 맛이 한층 되살아난다.

 

▲ 언덕너머, 2004

 

무르익은 필치에 의해 멋들어지게 휘돌아드는 세련된 문인화와는 형태상 전혀 다른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소천 김천두(小天 金千斗)는 세련된 멋을 애써 회피한다. 해서에서 보여주는 그 힘차고 자유로우며 세련된 필획은 간곳없이 별안간 어리숙한 모양으로 바뀌면서 고졸한 붓놀림에 의해 떠오르는 절지화는 음미할만하다.

 

▲ 운심, 2004

 

실제로 지난날 국전에 출품했던 모란이라든가 매화 등의 큰 작품은 문인화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보여준다. 어느 면에서 글씨에 능한 김천두(KIM CHUN DU)화백의 입장은 산수화보다는 문인화에서 더 큰 소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 설송, 2005

 

이미 자연 연령 고희라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시․서․화에 전념해온 데 대한, 즉 그 같은 삶에 걸맞는 쪽은 오히려 문인화 쪽이 아닐까 싶다. 형식에 얽매이는 산수보다는 경계가 여유로운 문인화야말로 노경 (老境)의 자유로움을 전개하는데 적합하리라는 의미다.

문인화 문제야 그렇다 치고, 문인화가 김천두 산수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세속을 잊게 하는 한가로움을 얻고 있다. 그래서 그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얽힌 속진을 씻어내는데 부족하지 않다. 산수화, 더구나 남화 산수의 맛과 멋이란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이리라.

그의 고희전은 그런 의미에서 오직 화업에 한 생을 바쳐온 데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그림 속에서 그런 경계를 찾아내 음미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여백이 아닐까.

△글=신항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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