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제가 고조선의 공간적인 축소를 위해 저지른 만행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중국이 강점하고 있는 만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난하 옆 갈석산에 존재하던 점제현 신사비를 평양 근처인 온천으로 옮겨 놓는다. 낙랑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점제현 신사비는 낙랑 25현 중의 하나인 점제현에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낡은 신사를 복원해서 신에게 바치면서 기원하는 기도문을 조각하여 세운 비석이다. 그 비문의 내용 역시 신에게 현에 사는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비석은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비석이다. 특히 이 비석이 서있던 자리야 말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점제현이 낙랑 25현 중의 하나였으니, 이 비석이 서있던 자리가 곧 낙랑군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서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설치했고 고구려가 한사군을 멸망시켰으니, 낙랑이 있던 자리가 고조선이 있던 자리이고 그 자리가 고구려가 있던 자리로서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선조들이 생활했던 영토라는 의미다. 즉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점제현 신사비의 위치가 바로 난하 옆이니 대한민국의 영토는 난하까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저 광활한 만주가 모조리 우리 영토가 되는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가 난하 옆 갈석산에서 평양근처인 온천으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는 북한 학자들이 이미 검증한 바다. 그들이 검증한 바에 의하면 점제현 신사비를 만든 화강암의 생성연대가 평양 근처의 화강암 생성연대보다 무려 2천8백만년~2천2백만년이 더 오래 됐다고 한다. 그리고 화강암의 구성 성분 역시 작게는 2배에서 크게는 10배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후에 논문으로 게재했다. 지금처럼 운송이 자유로운 시대에도 비석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난하 옆 갈석산에서 평양 근처인 온천까지 화강암을 옮겨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여러 가지 요건을 살펴볼 때, 점제현 신사비는 갈석산에 세워졌던 것을 낙랑의 위치가 평양을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옮겨 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점제현 신사비 뿐만 아니라 평양 근처에서 발굴되는 소위 낙랑 무덤이라는 것들에서 출토된 봉니, 갑옷, 동검 등등을 분석해서 북한 학자들은 <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집을 통해서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 근처라는 것은 왜곡된 것이며 낙랑의 위치는 난하 바로 옆 갈석산을 중심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점제현 신사비를 비롯한 낙랑 무덤에 관한 연구에 의해서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이라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륙의 만주 서쪽 난하에서 출발하는 광활한 영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조작하고 날조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 국사를 그렇게 쓰고 또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반도사관 혹은 식민사관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는 단군왕검이라 하여 단군은 제사와 정치를 겸하였기 때문에 단군왕검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배웠다. 1세 단군을 왕검이라 부르고 47세 단군을 고열가라고 부르는 등 각각의 단군에게 서로 다른 묘호(廟號)가 있다는 것은 먼 훗날 필자 스스로 고조선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지도가 토끼 모양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지도 중 한반도의 모양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우리나라 지도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실제로 우리 선조들이 그린 그림 중에는 호랑이가 앞발로 대륙을 짚고 있는 모습으로 한반도를 표기하고 있다. 꼬리로는 대마도를 박차고 뒷발 하나는 제주도를 발판삼아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이다. 더더욱 지금은 우리가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도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배웠다. 을사늑약의 ‘늑(勒)’자가 ‘굴레 륵’자로 ‘굴레, 억누르다, 억지로 하다’라는 뜻인데 이걸 보호조약이라고 배웠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