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받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법정관리 상황이 굉장히 절망적이었거든요. 변호사나 판사의 법적 조언은 전혀 위로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회사 파산을 진행한 경험을 다룬 책 `파산수업`(출판사 비아북)으로 풀어낸 정재엽씨. 회사를 법정관리에 넣었다가 살리는  과정을 겪는 동안 지친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문학이었다. '파산수업'은 절망과 문학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금수저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경영수업을 하던 중 아버지가 경영하던 제약회사가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위반으로 졸지에 영어의 몸이 됐다. 아들 정씨는 빚더미 회사의 대표가 되어야 했다. 작가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유학도 다녀왔다. 모두 부유한 가정환경 덕택이었다.  회사의 부도로 그가 짊어진 빚은 130억원이었다. 회사는 회생하기 위해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수원지방법원에 신청한 첫 번째 법정관리는 기각됐다. 회사는 서울법원에 다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은 이 회사에 대해 회생절차를 개시했고 우여곡절 끝에 회사는 M&A(인수합병)됐다. 합병대금으로 회사는 채무를 모두 갚았다. 그가 법정관리회사의 대표가 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은 모두 바뀌었다. 직원들의 반발과 채권자들의 독촉.

그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친 삶이었다. 

▲ <사진=파산수업>

왜 하필 문학인가?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회사가 힘든 지경에 빠졌는데, 소설은 무슨 소설이냐. 법전을 보든가 회생사건에 대한 판례를 공부해야지''라고 주위에서 말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법정관리 들어간 회사를 두고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많이 답답해했다. 도피할 곳이 필요했다.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간 곳이 소설책이었어요. 절망적인 주인공들의 상황이 저와 동일시되니까 비로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는 타인이 절망적인 상황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에서 진정 위로 받았다고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힘든 상황에서 꼭 문학만이 파산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위로받을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는 노력이에요. 그 과정이 있어야 절망이 극복된다고 봅니다''

그는 절박한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은 분명 고독하지만 위로 받을 수 있는 무언가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죽어도 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서울법원에서 두 번째 회생절차를 밟을 무렵, 거래처 포장업체 사장이 대금 1000만원을 정산해 달라고 아파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더란다.

''법정관리를 받는 회사는 법원의 허락 없이는 돈을 갚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고쳐 말했다.

''사실은 돈 1000만원이 없었어요. 없어서 못 주는 그 상황과 소란스러운 상황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에 저는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이게 내가 죽어야 끝이 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마포대교를 걸었다. 죽기 위해서.

''죽으려고 했더니 정말 죽으면 끝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저에게는 죽으면 빚이 정리되어야 죽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우습지만 마포대교 위에서 법률적으로 죽으면 빚이 없어지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습니다. 죽어도 빚은 대물림 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게 죽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상속포기라는 제도가 있긴 하다. 사람이 죽으면 처와 자식이 석 달 이내에 가정법원에 채무 상속을 포기하는 신청이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이들이 석 달 이내에 이것을 제대로 할지 걱정됐다고 말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사망하면 채무가 소멸될 수 있느냐'는 법률적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이후로도 거래처 사장은 집 앞에서 자주 1인 시위를 했다. 그 때마다 그는 발작증세를 일으키고 호흡곤란 증세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공황장애의 시작이었고 자살 충동의 원인이었다.

▲정재엽씨가 인터뷰중 당시 파산의 고통스런 상황을 말하고 있다. 사진=노연주 기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던져라..그 다음은 '내 문제'가 아니다

''법정관리 기간을 견디게 해준 책중 하나가 프랑스 소설 ‘자기 앞의 생’입니다. 주인공 모모는 세 살 때 버려진 고아입니다. 아이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창녀, 노인 등 사회소외계층과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희망과 사랑을 배웁니다. 이 빚더미에서 나는 모모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밀아자르가 쓴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한 여인이 주인공 모모와 창녀의 자식들을 보살피다 죽는 내용이다. 자신을 돌봐 준 이 여인이 죽었을 때, 모모는 시체를 지하로 옮겨 화장을 시키고 향수를 뿌리며 곁을 지켰다.

그는 "이 소설에서 지하는 제가 안식할 수 있는 성당과 같은 장소에요. 객관적으로 엽기적인 상황이지만, 모모의 입장에서 지하는 안식처인거고, 시체를 지키는 것은 주인공 모모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 사랑이 더 빛나 보였습니다''

▲ 그는 현재 벤쳐기업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사진= 노연주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중요한 것이라고 느끼게 해 준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제 상황이 무서웠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대답해 줄 수 없는 상황을 그들에게 던지게 되더군요. '기다리세요!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입니다''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매우 말쑥했다. 그는 힘든일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벤쳐기업의 임원이 된 그는 틈틈히 강의도 나간다고 했다. 의료기기 벤처기업인 아이메디신의 영업 및 마케팅 총괄이사다.  

"책이 얼마나 팔렸나구요? 일단 1쇄는 다 팔렸습니다"라고 그는 웃었다.

"주위 사람들이 책을 읽고서 저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이 재미있다는 말을 해 주셨고(웃음) 미안해 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평소 힘들다는 얘기를 잘 하지 않아서 저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거죠"

그의 삶은 변했다. "험한 일을 겪고 아주 소소한 일에 감사해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버스를 탈 때도 버스비가 있어서 감사하다고 할 정도로 일상의 감사함을 많이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힘든 일을 겪고 나니 절망에 대해 직시하는 법을 익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