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엠마 왓슨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 <미녀와 야수>가 국내외에서 흥행몰이 중이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야수로 변한 왕자가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왕자는 어린 시절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노파를 냉대한 일이 있다. 부족한 것 없이 건방지게 자란 그는 그 대가로 야수가 되고 만다. 실은 그 노파가 마법의 요정이었던 것이다.

요정이 그냥 떠났다면 다소 무미건조한 비극으로 끝났을 이야기가 요정이 남긴 조건 하나 때문에 더없이 흥미진진해진다. 야수는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나아가 그런 사랑을 누군가에게 받아야 다시 왕자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흉측한 외모의 야수를 사랑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영화는 가망 없어 보이는 야수의 ‘희망고문’을 따라가며 진실한 사랑의 본질을 더듬는다.

야수를 조금 도와주면 어떨까? 우선 진실한 사랑부터 알아보는 게 좋겠다.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란 대부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주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만큼 난해한 것도 없다. 도대체 누가 사랑을 명쾌하게 한두 마디로 정리해낼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기 위해서는 차라리 ‘적어도 이것만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한 것을 찾아 하나씩 지워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질문을 바꿔볼까? 적어도 무엇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가?

‘돈 때문에 너를 사랑한 거야.’ 통속적인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대사지만 저 안에는 진실한 사랑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조건 없는 사랑을 원한다. 돈 때문이었다고? 그런 말을 듣고도 진실한 사랑일 것이라 믿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뭐든. 우린 사랑의 본질적인 이유가 저런 조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길 원한다. 진실한 사랑이란 다른 무엇보다 상대방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니 요정은 도대체 얼마나 짓궂은 것인가? 요정이 아니라 악마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그는 진실한 사랑을 해야 마법을 풀 수 있다. 사랑이 처음부터 마법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든 진실할 수 없다. 결국은 그 사랑의 최종 목적은 마법을 푸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나를 왜 사랑해? 마법을 풀어야 하니까. 그는 마법을 풀 수 없다.

야수는 결국 벨을 떠나보낸다. 왕자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그녀를 놓아준다. 하지만 그 행위를 통해 그는 도리어 자신의 사랑을 입증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이유조차 포기함으로써 그는 진실한 사랑에 도달하고 만다. 역설적으로 그는 마법을 푸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마법을 풀 자격을 얻게 된 셈이다.

 

영화를 보면, 행복했던 시절 야수는 벨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즐겨 읽곤 했다. 벨을 보내고 야수 역시 저 비극의 두 주인공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훨씬 너그럽다. 벨은 돌아오고 야수는 왕자로 부활한다. 동화적인 결말이지만 헤겔의 말을 떠올린다면 여기서도 사랑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의 참된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하여 자신을 다른 자기 속에서 망각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소멸과 망각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데 있다.’ (헤겔)

<로미오와 줄리엣> 소설에서 자신을 찾아온 로미오에게 줄리엣은 말한다. ‘여긴 죽는 곳이에요.’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그랬듯 사랑은 죽는 일이다. 또한 야수가 그랬듯 사랑은 그 때문에 죽었다가 그 덕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구속하고 강요하고 심지어 폭행하면서 사랑을 그 이유로 대는 이들이 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 죽는 것도 변하는 것도 야수다. 사랑은 죽는 일이라지만, 죽어야 하는 것도 바뀌어야 하는 것도 상대방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