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행정(展示行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내용도 없이 주로 전시 효과만 노리고 추진되는 관 주도의 이벤트를 비꼬는 말이에요. 비슷한 개념으로는 "세금도둑"이나 "또 보도블럭이냐, 차라리 색다른 것을 찾아봐라" 등이 있지요.

하지만 전시행정을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닌 것이, 일단 전시행정으로 인해 나름의 공공적 이득을(사적인 이득이 아닙니다) 얻는 틈새계층이 있을 수 있는데다 일부 사업의 경우 최초 의도는 순수하게 시작되었을 여지가 개미눈꼽만큼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웃풋'이 나쁘다고 '과정'과 '동기'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알리바바의 정체성?
중국의 알리바바는 C2C 플랫폼인 타오바오와 B2C 플랫폼인 티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알리바바의 정체성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롭거든요.

마윈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줄기차게 알리바바의 목표를 설명하며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모델"이라고 강조합니다. 기업들이 입점하는 티몰은 당연하고, 개인간 C2C 거래인 타오바오도 마찬가지에요. 알리바바는 태생적으로 '플랫폼'을 지향했으며, 이를 공적인 생태계로 격상시켜 자신들의 전자상거래 왕국을 확장시켰습니다.(물론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과 보폭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이런 정체성을 가진 관계로, 마윈 회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거래에서도 나름의 배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지난 1월 마윈 회장은 트럼프 당시 당선인을 만나 "미국에 일자리 100만개를 만들겠다"는 공언을 했어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10만개의 일자리를 공언했는데 마윈 회장은 딱 10배의 일자리를 약속했습니다. 중서부 러스트 벨트의 블루컬러 지지를 받아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반색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마윈 회장의 약속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자리 창출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습니다. 마윈 회장은 "미국 상인들이 중국에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겠다"며 "이렇게 되면 10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진짜 이 약속을 일자리 창출로 알았을까요? 정치적 레토릭에 따른 전략적 판단에 무게가 실리지만 뭐 어떻습니까. 미국인들은 "100만개 일자리"라는 단어에 열광했고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요. 다만 현지 전문가들은 싸늘했습니다. 컨설팅 업체인 BDA 차이나의 던컨 클라크 회장은 마윈 회장의 약속을 두고 "(트럼프와 만나 사진을 찍기 위해 급조한) 로비성 사진촬영 기회"라고 폄하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그런데 생태계를 창출하려는 알리바바의 정체성과, 마윈 회장의 파격적인 약속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관계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알리바바는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모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있지요. 이는 "기업들이여, 판로를 원하는가? 우리가 플랫폼이 되어 주겠다"는 전제로 이어집니다.

즉 알리바바는 자신들이 주인공인 상태에서 거대한 장터를 깔아주고, 기업들을 끌어들여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을 전개하며 "기업들이여, 우리 플랫폼에서 물건을 판매하니 좋지?"라고 되묻는 격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미국 100만개 일자리 약속도 가능했죠. "중국에 물건 판매하게 해줄게, 좋지? 100만 일자리는 금방이야"

타오바오와 중국 농촌의 만남
알리바바의 이러한 전략은 네이버의 스몰 비즈니스와 비슷해요. "크리에이터여, 실력을 펼쳐라! 우리가 판로가 되어주겠다!" 크리에이터도 좋고, 네이버도 행복해지는 생태계의 완성입니다.

다시 알리바바로 돌아와서, 이러한 정체성의 핵심은 사실 티몰에서 찾을 수 있지만 순수 C2C로 작동하는 타오바오도 나름의 시사점을 가지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어쩌면, 타오바오야 말로 마윈 알리바바 회장의 경영철학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중국은 ICT 강국입니다. O2O와 간편결제, 모바일 메신저의 삼각동맹이 위력을 발휘하며 실리콘밸리를 위협하는 거대한 손으로 변신하고 있어요. 물론 최근 기존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현 상황에서 중국의 ICT 경쟁력은 대한민국을 상회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여기서 알리바바의 타오바오와 농촌의 만남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리바바는 2014년 '타오바오 농촌 플랜'을 발표하며 자사의 '천현만촌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죠. 정체가 뭐냐? 한 마디로 농촌을 작은 쇼핑몰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알리바바는 농촌에 무료로 서비스센터를 열어 주민들에게 ICT 인프라를 소개하고 교육하는 한편, 현지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저장하고 판매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수확한 농수산품이나 제품을 타오바오에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죠.

얼핏 나쁘게 보면 19세기 식민지 시대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문명화에 이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요. 물론 당시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무력으로 개척해 자국의 상품을 강매하는 수탈의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알리바바는 철저한 상생의 연결고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농촌 주민들은 알리바바가 알려준 ICT 신세계를 통해 일종의 문명화 과정을 밟으면서도, 상품을 전자상거래로 판매해 높은 소득을 거둘 수 있습니다. 물론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는 상품 판로 및 유통의 측면에서 상당히 촘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지요.

부럽습니다. 그리고 이 부러운 마음을 국내사정과 슬며시 대비해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할까? 기업에서 시작된 철저한 경영의 철학이 사회 전반을 부흥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사례는 없을까?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 부드러운 CM송이 흐르며 "오늘도 **전자 AS센터 **씨는 구슬땀을 흘리며 농촌마을을 누비고 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환하게 웃는 배우가 어설픈 현지봉사를 나서는 CF는 무시하고, '진짜'는 없을까?

정말 열심히 사례를 찾아봤고, 몇몇 의미있는 장면을 확인하기는 했으나 타오바오가 보여준 위력에 필적하는 대대적인 실험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두 눈을 번뜩 뜨이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더군요.

▲ 출처=홈페이지

정보화 마을의 한계
바로 정보화 마을입니다. 물론 기업이 아닌 국가의 주도로 이뤄진 사업이지만, 정보화 마을은 타오바오와 농촌의 만남과도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정보화 마을 조성사업은 2001년부터 당시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농어촌지역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입니다. 지역에 초고속 인터넷 이용환경을 조성하고 전자상거래(!) 등의 시스템을 도입해 도농간 정보격차 해소 및 지역 주민의 정보생활화 구축과 실질적인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합니다.

타오바오와 농촌의 만남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타오바오가 서비스 센터를 통해 주민을 교육하는 것과, 전자상거래 등의 시스템을 도입해 실질적인 수익 창출을 추구하는 장면까지. 시기적으로 보면 타오바오의 실험이 정보화 마을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보화 마을은 그 자체로 훌륭한 가치창출에 나섰으나, 현재 결론적으로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초창기 막강한 자금지원으로 나름의 인프라를 마련했으나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며 동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정보화 마을 지정 반납을 선언하는 곳도 생기고 있어요. 전국 기준으로 정보화 마을 지정은 2010년 366곳, 2013년 359곳, 2015년 358곳으로 서서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2009년부터 신규 정보화 마을을 지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타오바오와 정보화 마을의 명운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체의 차이입니다. 관 주도의 모든 행정을 전시행정이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정보화 마을은 일종의 새마을 운동처럼 계몽(문명화)에 입각한 사회개조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 핵심주체인 정부의 관심이 시들해지는 순간 방황하는 거에요.

하지만 타오바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업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경영철학을 관철시키고,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농촌을 선택했습니다. 당연히 전자상거래 등의 ICT 전문 노하우를 생생하게 접목하는 것도 가능했어요. 기업의 공적인 역할과 이윤적 추구의 '합일'을 빠르게 좁힐 수 있는 지점.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민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