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 인수전이 시계제로 상태에 빠져들었다. 매물로 나온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 인수금액이 최대 26조원에 달하는 가운데 각자의 합종연횡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대만 홍하이가 있다. 애플을 필두로 한 미국 기업의 존재감과 웨스턴디지털의 한 방이 여전한 상태에서, 홍하이가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하기 위해 자국의 TSMC는 물론 최근 SK하이닉스에도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시나리오?
현재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인수전에 나선 곳은 회사와 펀드를 합쳐 10개사가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바는 최초 반도체 지분의 20%만 넘기는 선에서 급한 불을 끄려고 했으나, 원전 손실이 예상보다 크다는 이유로 경영권을 포함한 지분 50% 이상을 넘기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의 기업가치가 20조원에 달하며, 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하면 최대 26조원의 자본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결단이 알려지며 인수전에 뛰어든 기업들의 머리도 복잡해졌다. 당장 업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가 부상했다.

먼저 홍하이와 SK하이닉스의 협력. 지난 1일 홍하이의 궈타이밍 회장이 샤프 디스플레이 공장 기공식에 참여해 "도시바를 위해 자금을 쏟아붓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인 상황에서, 홍하이와 가까운 SK의 동맹이 각광을 받았다. 어차피 단독입찰로 26조원의 금액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공감대다. 여기에서 홍하이가 SK하이닉스와 손을 잡고 도시바를 공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었다.

타도 삼성전자를 외치며 노골적인 반한감정을 숨기지 않는 궈타이밍 홍하이 회장의 내력을 보면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궈타이밍 홍하이 회장은 2012년 6월 주주총회에서 “샤프와 협력해 최대 5년, 삼성전자를 꺾겠다”고 공언하며 “아이폰에 비하면 갤럭시는 부끄러운 제품이고 삼성전자는 말 그대로 배신자”라는 망언 수준의 폭언을 서슴치 않아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가 한국인을 가오리방쯔(고려몽둥이, 중국인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로 부르며 경멸한다는 사실도 업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연하자면 그의 삼성전자에 대한 증오는 2010년 가격 담합 논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의 LCD 업계가 가격 담합을 이유로 유럽에서 대규모 과징금을 물었는데, 삼성전자만 자진해서 먼저 신고를 하는 리니언시 제도를 통해 이를 피해갔기 때문이다. 궈타이밍 회장이“배신자 삼성을 몰락시키는 것이 내 일생의 목표”라는 일갈을 남기는 이유다.

하지만 궈타이밍 홍하이 회장은 의외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는 각별한 사이다.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의미있는 인기를 끌었던 SK텔테콤의 루나 제작을 홍하이가 맡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궈타이밍 회장은 최태원 SK회장이 수감되었을 당시 그를 찾아가 직접 면회하기도 했으며, 최태원 회장도 사면 후 해외시장 공략을 목표로 중국을 찾았을 때 일부러 대만으로 넘어가 궈타이밍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양사는 스마트 팩토리 사업 분야에서도 협력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디스플레이 자존심인 샤프를 손에 넣은 궈타이밍 홍하이 회장이 최태원 SK회장과 협력,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것은 매우 상식적인 전망이 된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삼성전자에 타격을 가하는 한편, 미래 산업의 동력을 확보하는 일타쌍피의 방법론이다.

(편집자 주 - 참고로 지난해 홍하이의 샤프 인수가 확정되기전,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샤프를 인수할 것이라는 말이 크게 회자된 바 있다. 일본언론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013년 삼성전자가 샤프에 1200억 원을 출자할 당시 직접 현지를 방문해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2015년 10월에는 일본 대형 금융사 대표와의 만남에서 “샤프를 지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분명 사업적 방법론에 따른 냉정한 행보겠지만, 홍하이가 삼성전자와 관련된 인수합병 복마전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것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다만 홍하이와 SK하이닉스의 협력은 그 자체로 불안한 리스크도 가지고 있다. SK는 현재 반도체에 주력하고 있다. 당장 지난 2015년 8월 M14 준공식에서 선언했던 중장기 투자계획의 연장선에서 청주 공장 건설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2017년 8월부터 2019년 6월까지 2조2000억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건물과 클린룸을 건설하는 것이 골자다.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청주에 건설되는 신규 반도체 공장은 4차 산업혁명 등 미래를 대비하는 SK하이닉스의 핵심기지가 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룹 차원의 수직계열화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SK㈜는 지난해 반도체용 특수가스 제조업체인 SK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며 반도체 소재 사업에 진출했으며, 최근 반도체 칩의 핵심 기초소재인 반도체용 웨이퍼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조∙판매하는 전문기업인 LG실트론까지 품어낸 상태다. 현재 SK하이닉스는 D램 2위, 낸드플래시 5위 사업자다.

반면 홍하이는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이 약하다. 그런 이유로 양사의 격차를 고려할 경우, 연합전선의 구축으로 큰 이익을 얻는 것은 당연히 홍하이가 된다. 또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인수를 바탕으로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홍하이와의 연합전선을 확정한다고 해도 '일본 정부의 반대'라는 산도 넘어야 한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면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 배경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도시바와 낸드플래시를 접점으로 삼는 웨스턴디지털의 인수다. 최초 도시바 사업부 매각 정국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던 웨스턴디지털은 샌디스크를 인수해 낸드플래시에서 이어지는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SSD로 연결하는 중이다.

웨스턴디지털의 최대 강점은 도시바와의 접점이다. 이미 일본 시가현에서 도시바와 공동 공장을 설립해 협력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인수에 성공할 경우 가장 막강한 시너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업계 일각에서 "도시바를 넘긴다면 차라리 애플처럼 미국 기업에 넘겨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웨스턴디지털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웨스턴디지털은 자금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 이유로 업계에서는 웨스턴디지털이 단독으로 입찰에 참여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마지막 시나리오는 제3의 컨소시엄.  인텔과 TSMC, 애플 등 인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도시바와 일본 정부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기업들이 인수전에 나설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 출처=도시바

홍하이, 판을 흔들다
세 가지 시나리오 중 가장 신빙성이 컸던 것은 단연 홍하이와 SK하이닉스의 협력이었다. 일부 리스크가 있지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로드맵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7일(현지시간) 홍하이는 자국의 TSMC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실제로 대만 IT 매체 디지타임즈에 따르면 홍하이는 TSMC와 도시바 반도체를 인수하기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큰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다. 홍하이는 8K UHD 해상도 시대를 준비하며 샤프의 디스플레이 경쟁력과 이를 처리 및 운용할 수 있는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체화해 일종의 부분적 수직계열화를 노리고 있다는 평가다.

▲ 출처=위키디피아

그런데 또 반전이 벌어졌다. 9일 업계에 따르면 홍하이가 SK하이닉스와의 공동출자를 타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중화권에 샤프를 빼앗긴 일본이 '차라리 미국'을 바라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까운 한국의 기업과 협력전선을 짜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해 SK하이닉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홍하이 주도의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인수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홍하이는 SK하이닉스와의 연대설에 얽힌 상태에서 TSMC와 구체적인 컨소시엄을 구축하는가 싶더니 다시 SK하이닉스와 공동출자를 타진하고 있다는 소문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행보는 원전 손실로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은 도시바가 '헐값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가운데, 홍하이가 나름의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 홍하이 공장. 출처=위키디피아

이번 인수합병 복마전의 배경을 천천히 따라가면, 홍하이 자체의 야심에 집중할 필요도 생긴다.

현재 120만명이 넘는 직원을 보유한 홍하이는 스스로를 하청업체로 포지셔닝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단숨에 원청업체를 잡아먹는 킬러 본능을 가지고 있다. 소니의 TV와 모토로라의 휴대폰 등 원청기업이 흔들리는 순간 이들을 사들여 하청업체의 지위로 확보하고 있던 경쟁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최근 '세계의 공장'에서 탈피해 독자전인 전자 및 IT기업으로 변신하려는 행보에도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

결국 이러한 홍하이의 야심은 샤프를 넘어 도시바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미 인수전의 주요 플레이어로 부상한 상태에서, 홍하이의 전략적 파트너 선택에 따라 26조원에 달하는 쩐의 전쟁이 출렁일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