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판이 커지고 있는 도시바 인수전 2라운드에 참전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제안이 오면 검토하겠다"는 수준이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의 출사표로 받아들이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장기호황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낸드플래시에 집중한 신정장 동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재의 낸드플래시 시장 상황과 중국의 참전 여부, 웨스턴디지털의 존재감과 더불어 도시바의 행보 및 일본 정부의 노림수 등 복잡한 상황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아가 SK하이닉스가 D램에 90% 이상의 자원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도시바 낸드플래시 역량의 흡수가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말도 나온다. 결국 복잡한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 출처=한국반도체산업협회

박성욱 부회장, "검토할 것"
박성욱 SK 하이닉스 부회장은 23일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정기총회에서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 가능성을 두고 "아직 제안이 오지 않았지만, 제안이 오면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전이 '의외의 국면'에 접어든 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참전 가능성'에 무게를 둔 분위기다.

현재 도시바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시작은 2006년이다. 당시 도시바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며 일본 정부의 원자력 르네상스 정책에 무리한 보폭을 맞춘 바 있다. 일각에서 원전 사업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2015년까지 원전 사업 매출을 3배로 늘리겠다는 공약을 남발하며 아름다운 미래만 그렸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도시바의 무리한 원전 사랑은 일본 정부와의 끈끈한 커넥션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원전 사업의 규제가 강화되고 사업성이 불투명해지는 한편, 설상가상으로 2015년 약 7조9000억원에 달하는 분식회계 파동이 벌어지자 기업 자체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원전에서만 약 7조1600억원의 손실이 났으며, 결국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매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에 이르렀다. 시가 시게노리(志賀重範) 도시바 원전사업 부문 회장은 사퇴했다.

여기부터 셈법이 복잡해진다. 최초 도시바는 1차 입찰 당시 19%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지분을 팔아 약 3조원의 자금을 유치하기로 했다. 미국의 웨스턴디지털과 마이크론, 홍하이를 비롯해 SK하이닉스가 입찰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에 뛰어든 배경은 단 하나, 바로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현재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장기호황을 예고하고 있으며 낸드플래시의 존재감이 D램을 빠르게 추격하는 상황이다. 시장조사기관 IHS테크놀로지에 따르면 2015년부터 823억 기가바이트(GB)이던 낸드플래시 시장은 2020년 5084억GB까지 확대되는 등 연평균 성장률이 44%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시바는 낸드플래시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원조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도시바의 매력이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지분 20%로는 핵심기술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이미 도시바와 연합전선을 이루고 있는 웨스턴디지털 입장에서는 여전히 매력있는 매물이지만, 당장 낸드플래시 시장 톱3에 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도시바와의 접점도 없는 SK하이닉스는 전사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회의감도 감지되기도 했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면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청주에 2조2000억원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SK㈜가 지난 1월23일 이사회를 열어 ㈜LG가 보유한 LG실트론 지분 51%를 6200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의하는 등, 일종의 수직계열화 정책을 추구하는 대목은 당연히 '낸드플래시 시장 장악 시나리오'를 시사하지만, 2위 사업자이자 이미 웨스턴디지털과 연합전선을 이루고 있는 도시바의 '고작' 20% 지분을 얻으려 3조원에 달하는 베팅에 나서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바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20% 지분 매각을 미끼로 삼아 당장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일각에서 20% 지분 확보에 대한 회의감이 번지는 것은 '단가 후려치기'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필요한 쪽은 도시바며, 주도권은 입찰에 응한 기업들에 쥐어지는듯 했다. 

분위기가 일변한 것은 도시바의 2차 베팅이다. 원전 손실로 인한 피해액이 예상보다 큰 것으로 알려지며 도시바가 낸드플래시 사업부 지분의 50% 이상을 팔며 사실상 경영권까지 넘기는 것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성장동력인 반도체 경쟁을 포기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매각해야 한다면 확실한 매력 포인트를 살려 제값을 받겠다는 의지다. 인수금액도 기존 3배에 육박하는 1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20조원을 말하기도 한다.

고차 방정식..."장담할 수 없다"
2차 입찰은 판 자체가 커졌다. 금액도 10조원에 달하며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등 ICT 기업도 관심을 보인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이 지점에서 박성욱 부회장이 "검토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쩐의 전쟁'에 참전한 셈이다.

어떻게 될까? 도시바가 2차 베팅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시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이 출렁이는 것은 확실하다.

당장 새로운 플레이어의 참전이 점쳐지고 있다.

1차 베팅에 나서지 않았던 중국 칭화유니그룹의 행보에 시선이 집중된다.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칭화유니그룹은 미국의 마이크론과 샌디스크 인수를 타진했을 정도로 엄청난 먹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칭화유니그룹이 2차 입찰전에 뛰어들어 판을 바꿀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칭화유니그룹이 무리하게 게임에 나설 가능성을 낮게 보기도 한다. 칭화유니그룹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 공략에 전사적으로 나서는 것은 맞지만 최근 연이어 외국기업 인수합병에 실패하며 자체적인 공장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칭화유니그룹은 지난해 7월 XMC를 인수합병하는 식으로 세운 창장메모리를 내세워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 후베이성 지방펀드, 후베이성 과학투자 공동투자건설 등과 공동으로 지난해 12월 메모리 반도체 공장 설립을 시작한 바 있다. 나아가 청두와 난징에도 700억달러에 달하는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세계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 내에 적어도 26개의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며, 이는 외적인 발전을 잠시 접고 내적인 역량을 먼저 키우겠다는 최근 중국 반도체 시장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웨스턴디지털 지분을 늘려 샌디스크를 우회인수하려고 했던 역사가 재연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 역시 현 상황에서는 확률이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본 정부의 의지도 변수다. 당장 디스플레이 시장 측면에서 홍하이에 샤프가 넘어간 상태에서, 도시바의 반도체 경쟁력마저 외국에 넘어가면 현지 사업 인프라가 위험해진다는 불안감이 읽힌다. 디스플레이 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관 투자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JC)와 같은 방식이 도시바 사태에도 대입될 가능성이 솔솔 들려오는 이유다.

웨스턴디지털은 1차 입찰전과 마찬가지로 2차 입찰전의 유력한 승리후보로 꼽힌다. 이미 일본 시가현에서 도시바와 공동 공장을 설립해 협력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막강한 시너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도시바가 웨스턴디지털과 협력해 3D 낸드플래시 양산을 목표로 3년간 약 17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힌 대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양사는 일본 미에현 욧카이치 공장에 신규라인을 구축해 3D 낸드플래시 장비를 도입할 전망이다. 욧카이치 공장은 도시바와 샌디스크의 협력으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며 웨스턴디지털이 샌디스크를 인수하며 기존의 협력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 흐름을 살려 웨스턴디지털은 도시바 인수전에 가장 근접한 플레이어로 평가받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속내가 복잡할 전망이다.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지분 자체가 50%로 올라간 상태에서 무디스의 혹평은 무시해도 좋다는 평가다. 10조원이라는 자금도 큰 금액이지만 최근까지 벌어들인 영업이익을 고려하면 넘지 못할 산도 아니다. 만약 도시바 낸드플래시 역량을 흡수한다면 5위 사업자에서 단숨에 판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장기불황에 있어 중국 기업들의 참전에 따른 시장의 불투명성이 서서히 번지고 있는 점과, SK하이닉스의 핵심 먹거리가 여전히 D램에 집중되어 있다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최근 애플의 수주를 받아 D램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낸 지점도 SK하이닉스의 '다음 수'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과감하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장기호황을 믿고 10조원 베팅에 나설 것이냐, D램에 집중하며 서서히 낸드플래시 시장으로 넘어가는 기존 전략의 속도를 올리는 쪽으로 갈 것이냐. 박 부회장의 발언은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아무것도 예단할 수 없다.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