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2017년 2월17일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한국경제사(史)는 '처참한 날'로 기억할 것이 확실합니다. 최고 기업인 삼성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었으며, 40년동안 수송보국을 꿈꾸던 한진해운이 파산했기 때문입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국민 모두가 키워낸 피와 땀의 결정체들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하루만에 '뉴삼성'의 리더에서 피의자로, 한진해운은 클릭 한 번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 다른 기업도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특검의 칼날은 여전히 번득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트럼프 대통령 시대,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입니다. 경제지표는 날개잃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으며 각국의 보호 무역주의는 기승을 부리며 수출주도의 한국경제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당장 신발끈을 조이며 정신없이 달려도 부족할 시기. 하지만 우리는 비합리적이고 지탄받아야 마땅한 정치공작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입니다.

일본의 손정의 회장과 중국의 마윈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실리콘밸리의 급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까지 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미몽에 빠져 잠꼬대만 하고 있습니다.

신상필벌. 삼성이 자주 하는 말이죠. 이 말처럼 경제인들의 범법행위 가능성은 냉정하고 공명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근 한 재계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비선실세 논란에 휘말린 삼성을 두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군요. 사견임을 전제로 "삼성은 아마 기계적으로 최순실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무슨 뜻일까요?

한국은 정치와 경제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강합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서로 의식하면서도 긴밀하게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바로 정경유착.

두 권력의 상하관계를 따져볼 수 있을까요? 고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정치권력보다 경제권력이 위에 있다"는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일견 타당한 말로 들려요. 5년 대통령 임기제에서 정치권력은 한계가 있지만 돈의 힘은 연속적인데다, 부의 세습이라는 '치트키'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의 아래에 있었던 시기는 참여정부 시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참여정부가 최고의 정부는 아니었지만, 검찰 개혁 등을 통해 정권의 입김을 전 영역에 거쳐 서서히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경제권력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준 관계자는 다시 삼성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귀띔합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의 위에 선 지금, '삼성은 본능적으로 정권의 실세를 만났을 것이다'는 말. 좋아서? 아니죠.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의 패착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유착의 접점이 가하는 '압박'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순응한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에요. 물론 이런 말도 하더군요. "그걸 누가 버틸 수 있겠어"

정치권력의 말 한 마디에 사업이 날아갈 수 있는 시대, 직접적인 압박이나 간접적인 압박을 누가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삼성의 상황을 돌아보면, 이재용 부회장 승계 구도가 걸려있었어요.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부연입니다.

'승계 구도를 달성하기 위해 최순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승계 구도를 달성하는데 방해받지 않으려 최순실을 만났다'

물론 그의 말을 100% 동조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법원이 공명정대하게 가려주길 바랍니다. 다만 의미있는 시사점은 던져줍니다. 정치권력의 경제권력과의 만남. 그에 따른 불합리한 사태의 연속. 여기서 주로 정치권력은 가해자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국경제인연합회도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세력이 인기를 얻기 위해 경제인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잡아들여 죽인다 협박하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중심으로 "우리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경제발전에 활용해라"라는 기업인들의 탄식으로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국제그룹은 어떤가요.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인 ‘프로스펙스(PRO-SPECS)’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던 국제그룹은 1980년대 21개 계열사를 두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랐으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국제그룹 정상화 방안’을 통해 사실상 해체한 바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무리한 기업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이 거론됐지만 그 이면에는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밉보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정설입니다. 전두환 정부의 정치 지원금 모금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미운살이 박힌 상태에서 그룹 해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는 논리.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려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기도 했어요.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는한, 우리는 언제든 제2의 '오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결국 2017년 2월17일 한국경제 운명의 날. 본질을 파고들 수 있는 시각으로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의 우위에 따른 '질척한 연결'은 이제 걷어내고, 경제인들이 정치인들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은 벌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하자는 겁니다.

일각에서는 "팀 쿡 CEO와 에릭 슈미트 CEO가 정치인들 뒷돈 주다 걸리는 것 봤냐? 그러니 우리가 이 모양이지"라는 말도 하는가 봅니다. 네, 그러지 않죠. 하지만 그들은 공식적으로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합니다. 그것도 엄청나게요.

최근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정치자금 감시단체 CRP(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 보고서를 인용,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가장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인 기업은 알파벳이라고 밝혔습니다. 총 1185만달러에 달하며 이는 미국 전체 인터넷 기업의 25%에 달한다고 합니다.

정치인 여러분, 돈 필요하면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로비스트 활동에 전향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