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 228×184㎝ 장지에 혼합재료, 1998

 

이정연의 그림은 구도자의 행각과 같다. 속으로만 침잠되면서 부단한 모색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진아(眞我)의 형상화 작업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종교성이 짙게 스며 있기도 하다. 원래 이정연은 동양정신의 세계에서 예술적 입지를 굳혔다. 특히 불교사상이 주는 유현(幽玄)함에 경도 했었다. 그것은 미국유학 후 기독사상으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영성(靈性)을 간취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구도의 길이며 혹은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이정연의 작가적 이력에는 다양한 탐구과정이 돋보인다. 수묵화에서부터 채색화까지, 형상에서 추상까지, 종이에서 캔버스까지, 동양정신에서 기독사상까지, 그의 다양한 시도는 그만큼 작가적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제 다양한 시도의 준비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확고히 좁혀가는 것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폭 넓음 보다 깊이 있음이 더욱 돋보이는 세상이기도하기 때문이다.

 

▲ 260×195㎝ 장지에 먹 진채, 1998

 

이정연이 다시 개인전을 갖는다. 생활방식의 개인적인 변화아래 새롭게 선보이는 조형세계이다. 서울과 원주를 오고 가면서 추스린 사색의 결과물이다. 특히 그의 이번 작품은 정형외과의 병동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제작된 고통의 산물이기도 하다. 소독 내음 속에서, 피투성이 속에서, 사지가 온전치 못한 부상자들 속에서, 수술의 칼날 속에서, 그의 작품은 완성되었다. 화사한 온실 속에서의 음농농월 이라기보다는 삶의 전장에서 낚아 올린 모음(母音)이다.

이번 개인전의 주제는 대개 만남이란 단어로 축약 할 수 잇을 것 같다. 이는 새 생활의 일상을 일기식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화면은 차분하고도 온화한 색상으로 구축되어 있다. 다분히 상징성을 강하게 띄면서 유려하게 화면구성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의 화면 속에는 몇 가지의 상징 언어가 내재해 있다. 만남이란 주제를 용해시킨 도상일 것이다.

 

▲ 260×195㎝ 장지에 먹 진채, 1998

 

예컨대 두 개의 비슷한 형상의 유기적 관계가 그것이다. 그 형상은 상호 밀착되어 있으면서 타자(他者)와의 또 다른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보는 듯하다. 화면 속에는 화살표가 있다. 이는 서로 당기기도 하고 밀쳐 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화살표는 일상생활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돌발사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일이 점선으로 표현되는 것과 함께 나름대로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빠르게 이루어진 동심원을 새로운 환경에서의 잠재된 자의식의 발로이다. 평상심속에서의 새로운 사건이나 장면들, 그것은 거치른 필선의 동심원으로 집약되었다.

 

▲ 228×184㎝ 장지에 혼합재료, 1998

 

이정연의 화면은 무엇인가 다양한 도상들이 혼재해 있기도 하다. 그것은 복잡한 어떤 기계의 회로 같기도 하다. 또한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단면 같기도 하다. 혼란 속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역경의 기록이기도 하다. 혹은 이질적인 두 개의 개체가 하나로 만나 동체(同體)로 가는 과정의 임상보고서 같기도 하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분신, 나비가 날기도 한다. 아니면 서로 가지를 얽어매면서 하늘로 키를 키우고 있는 숲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이정연 작가는 구도자처럼 그동안 조용히 내면세계를 갈고 닦아 왔다. 때로는 너무나 거창한 주제로 혹은 일상 속의 가벼운 주제로, 각기 변화를 주면서 조형세계의 틀을 이루어 왔다. 이제 그의 다양한 시도는 서서히 집약되어 새로운 세계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만남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만남의 의미는 함께 가는데 가치가 있다. 그 만남의 내일을 주목하고자 한다.  

△글=윤범모/미술펑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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