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위기를 맞이한 한국 철강 산업이 ‘EU의 쇠락’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11년 재정위기의 더블 펀치를 맞고 큰 타격을 입은 유럽 철강 산업의 현실을 진단해 동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극한적 원가절감, 내수시장 지키기, 동북아 3국 간 협력 등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위기 여파 남은 유럽 철강 산업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가 최근 발간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유럽 철강산업, 회생 가능성 있나?>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로 EU 경제와 철강 산업은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이후 2011년 유럽발 재정위기까지 겹쳐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 출처 =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2015년 기준 강재소비는 2007년의 75%에 불과하다. 조강 생산은 79% 수준까지 회복하는 데 그쳤다. 강재소비는 2007년 최초로 2억톤대를 돌파했으나, 2009년 1억2200만톤까지 하락한 후 1억 5000만톤 전후에서 정체된 상태다. 조강생산도 2007년 2억1000만톤까지 증가해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 듯했으나, 금융위기로 급감한 후 2012년부터 1억7000만톤을 하회 중이다.

이러한 수요부진 속에 강재수입이 연평균 20%씩 증가한 반면, 수출은 정체해 결과적으로 가격 폭락 사태에 직면했다.

▲ 출처 =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특히 2014년 중국산이 전년비 72% 증가하면서 긴장감을 높였고, 2015년 다시 37% 늘어 위기감을 조성했다. 강재수출 길도 막혀 열연가격이 2015년 말과 2016년 초에 톤당 200달러대까지 폭락해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하락했다.

불황으로 표출된 구조적인 문제점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다. 철강 소비와 생산에서 세계 2위인 EU의 철강 산업 경쟁력은 수요, 공급, 비용, 정부체제 등 4대 구조적인 문제들로 인해 점차 약화됐다.

▲ 출처 =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첫 번째는 수요다. 경제 성숙화로 저성장 시대에 진입하고 서비스산업 비중도 늘어 철강재 사용이 감소되고 있는데, 추세 역전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금융위기 후 2% 이하의 경제성장률이 지속돼 왔는데, 미국 IHS에 따르면 2015년(2.1%)을 피크로 앞으로도 성장률이 계속 하락할 전망이다. 특히 이 같은 정체된 경제구조는 2012년부터 0.1%대로 진입한 인구증가율과 고령화 진전, 11%의 높은 실업률(청년층 약 30%)로 인해 개선되기 어려워 보인다.

▲ 출처 =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

인프라 건설 위한 재정 부족 등으로 건설산업의 침체가 지속되는 가운데 건설의 철강소비 비중도 39%(2006~2010년)에서 33%(2011~2015년)로 감소했다. 이에 EU 철강수요는 2025년까지 연평균 1% 남짓 증가한 후 2035년 부터는 쇠퇴기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급 문제도 있다. 1977년부터 지속된 생산능력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안돼 과잉능력 문제가 반복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오일쇼크 이후 가동률이 60%를 하회하자 EU 차원에서 과감한 시장 통제 정책을 실시해 1988년 70%대, 26년 말인 2000년 80%대를 회복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중국발 호황에 힘입어 생산능력을 증대시킨 상태에서 금융위기가 닥쳐 2013년부터 가동률이 다시 약 70%로 떨어졌다.

이에 유럽철강협회의 Eder 회장(Voestalpine CEO)은 15년 내 공급능력을 50% 감축하지 않으면 EU 철강산업이 몰락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유럽 철강산업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Mittal과 Tata는 과감한 설비폐쇄를 단행하고자 했지만, 인력 감축에 대한 노조와 현지정부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비용 문제다. 환경·에너지 비용과 노무비 등 생산비용의 지속적읶 증가로 EU 철강업계의 국제 경쟁력은 점차 약화됐다.

EU가 세계 기후변화협약을 주도하면서 제조업이 전반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가운데 에너지 소비비중이 높은 철강산업이 직격탄을 받게 됐다.Eurofer는 환경·에너지 등 각종 규제비용이 철강사 이익의 10~35%에 이른다며 EU 집행위에 공정한 국제경쟁을 위한 정책 개선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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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구조조정에 따른 종업원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높은 노무비와 지속적인 연금 부담은 유럽 철강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국영기업 유산을 가진 EU 철강사의 연금부담이 높은데, 종업원 수를 감축해도 퇴직자의 연금 부담은 남아 비용 감축이 어려운 상황이다.

네 번째는 EU 체재의 문제다. EU의 가입국 수 확대로 시장규모가 커진 반면, 이질성 확대와 관료주의화에 따른 효율성 약화로 철강산업을 보호하는 데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EU의 경우 규모는 거대해도 단일국가인 미국·중국·인도와 달리 제도와 법률 도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돼 신속한 조치를 취하기 힘든 구조다. 2013년 EU 집행위가 발의한 무역구제조치 개정안을 2016년 말에야 이사회가 합의했고, 금년 의회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승인해야만 시행 가능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2016년 58개 EU 철강사 CEO가 연대해 EU 집행위에 철강산업 붕괴를 방관할 것인지 아니면 회생시킬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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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결단

수요부진, 비용상승, 과잉능력의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한 유럽 철강 업계는 산업 내부 뿐 아니라 이업종 전환을 통한 대응방안을 모색 중이다.

고부가가치화 추진은 기본이고 제품특화, M&A와 함께 글로벌화와 다각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대부분 유사한 전략 추구로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우선 고생산 비용과 저가 수입재에 대응하기 위해 철강사마다 고부가가치화를 추진하고, 제품별 특화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도 공급과잉과 시장침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부가 가치화’를 제안하고 있지만, 자칫 파이가 적은 시장에서 공급과잉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00년대 중반 유럽 선진시장에 대규모 M&A 통해 진입한 Mittal과 Tata는 추가 M&A를 통한 사업 경쟁력 제고를 추진 중이다. ArcelorMittal은 시장지배력 확대, 시황조절 능력 제고, 경쟁자 진입 차단 등을 통한 수익성 개선을 목표로 이탈리아 ILVA 인수를 진행하고 있다.

일부 철강사는 유럽 철강산업의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업종 전환까지 고려 중이다. 1980년대부터 기계, 플랜트, 플라스틱 분야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해 왔는데, 최근 철강사업의 저수익성 심화로 다각화 추진이 가속화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Voestalpine는 복합 소재 및 가공 전문성을 가지고, 기술과 자본재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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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럽 철강산업은 주요 철강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2000년대와 같이 자력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 구원투수의 지원이 다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해 Tata UK 인수전에 참여 의사를 밝힌 7개사를 살펴보면 타지역 외국 철강사 이외에 부실기업 인수 전문기업들이 등장한 것이 특징이다.

POSRI는 내부 모순이 커진 EU 체제하에서 수요 추세, 과잉공급, 고비용 문제 등으로 유럽 철강산업의 쇠락 경향이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미 Mittal, Tata 등 외국계가 주도하고 있는 유럽 철강업계는 더욱 더 외국계에 지배될 가능성이 높고, 살아남는 유럽계 기업은 특정 제품·수익 중심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POSRI 임정석 수석연구원은 “한국 철강산업은 기본적으로 EU와 비슷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상황으로 주요 수출시장이자 선진기술개발 동향을 습득해온 EU 철강산업의 쇠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며 “한국 철강업계도 Negative China Effect로 인해 내수부진, 수입증가, 공급과잉, 보호무역주의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임 연구원은 “극한적 원가절감, 내수시장 지키기, 동북아 3국 간 협력, 순환경제에 적합한 사업모델 검토 등 대응책이 필요해 보인다”며 “철강공급 과잉이 지속되면 고부가가치 제품의 가격 프리미엄이 낮아진다. 결국 가격으로 승부하게 돼 원가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철강 수출환경이 녹록하지 않은 가운데 국내 수요 산업과의 공생을 위한 산업 간 상호협력 강화가 필요하다”며 “21세기 새로운 경영환경에서 요구되는 비즈니스 모델 및 사업방식 적용을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