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무대 위에 2명의 어린이가 긴장된 모습으로 서 있다. 안경을 쓴 심사위원은 첫 번째 어린이에게 ‘레시틴(Lecithin)’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이 여자 어린이는 긴장한 탓일까 L과 E까지는 잘 맞추다가 C대신 S라고 말하는 바람에 땡 소리와 함께 탈락했다.

두 번째로 무대에 선 남자 어린이도 긴장한 모습은 역력한데 이번에 제시된 단어는 첫 번째와 비교해서 쉽다는 생각이 드는 ‘밀크(Milk)’. 이 어린이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쉽게 스펠링을 불렀고 우승의 영광을 안게 된다.

이 광고는 미국의 우유가공위원회가 우유 촉진을 위해 만든 캠페인(Milk Processor Education Program)으로 우유는 다른 첨가제가 가공물이 없는 제품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유지방이 높은 우유 대신에 식물성인 두유나 아몬드 우유의 인기가 높아지자 두유나 아몬드 우유는 섞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액체를 합치기 위해서 제3의 물질인 유화제가 사용되는데 이것이 레시틴이라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킨 광고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는데 그와 함께 ‘스펠링 비(Spelling Bee)’라는 미국에서 인기 있는 경연대회의 형식을 이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스펠링 비는 사회자가 단어를 발음하고 예문을 말해주면 해당 단어의 스펠링을 하나씩 불러서 맞추는 대회로 각 급 학교에서 열리며 매년 전국적으로 열리는 대회도 있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도 받아쓰기를 하지만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발음만 들어도 맞는 단어를 쓰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영어는 발음과 실제 철자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성인들도 종종 실수를 하기 일쑤다. 철자에 발음이 되지 않는 묵음이 있거나 발음은 같은데 철자는 전혀 다른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철자 말하기 대회인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 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대회는 미국의 미디어 그룹 스크립스(E.W.Scripps)가 매년 5월 주최한다. 1925년 미국인들의 영어 철자와 어휘력 향상을 위해서 9개 지역신문사가 함께 협력해서 첫 행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1941년 미디어기업 스크립스가 후원사가 되면서 내셔널 스크립스 스펠링 비로 불리게 됐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던 1943년에서 45년까지를 제외하고는 매년 대회가 열렸으며 1994년부터는 스펠링 비 결승전이 TV로 전국에 중계도 된다. 스포츠 채널 ESPN을 통해 미국 전체로 중계되는 결승전은 해마다 900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는다.

스펠링 비 대회에는 14살 이하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데 우승자는 4만달러의 상금과 함께 미국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에 초청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워낙 오래된 행사인 데다 백악관 초청이라는 영예까지 있다 보니 각 학교마다 ‘똘똘하다’는 학생들이 지역 학교에서 예선을 치르고, 각 주별 예선을 거쳐 워싱턴에서 열리는 본선에 참가한다.

초기에 시작된 스펠링 비에서는 상대적으로 쉬운 듯한 단어인 테라피(Therapy, 1940년), 콘도미니엄(Condominium, 1956년) 등의 단어가 등장한 반면 90년대 이후에는 어원이 그리스단어에서 넘어온 학술적이거나 의학적인 용어들도 포함되면서 훨씬 난해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2011년 우승자를 가른 단어는 굽슬굽슬한 머리를 가졌다는 뜻의 사이모트리커스(Cymotrichous), 2014년에는 한 줄 이내의 짤막한 대사를 연이어 주고받는 연극식 대화인 스티코미시아(Stichomythia)가 최종 우승자의 단어가 됐다.

올해의 우승 단어는 게젤셰프트(Gesellschaft)로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에스가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와 대비적으로 사용한 개념으로 이익사회를 의미하는 사회학 학술용어였다. 14살 이하의 어린이들이 이런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특히 2000년대 들어오면서 스펠링 비의 우승을 대부분 인도계의 미국 학생들이 차지해서 이들의 특별 비법에 관심이 모였다. 지난 2008년부터는 단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스펠링 비의 우승자는 인도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전문가들은 암기를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미국 어린이들에 비해 암기가 중시되는 인도식 학습 방법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