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풍태합 히데요시는 원정군이 육전에는 연전연승하는 보고를 받고 만족하였으나 수전에서 연전연패하는 보고를 듣고 매우 불평하고 화를 내었다. 박홍과 원균 같은 장수는 말할 가치도 없었지만, 이순신장군이 있는 한 명나라를 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네, 그런즉 히데요시는 와끼자카 야스하루를 수군총사령관을 삼고, 도변칠우위문과 모리일기수 이하 여러 장수로 부장을 삼아 먼저 번 싸움에 패한 가등가명, 내도통총 이하 제장들에게 군사를 주니 패잔병과 합류한 숫자는 십만 명입니다. 새로 대함대를 편성하여 이순신장군의 함대를 섬멸하려고 했습니다.”

“음! 일본군이 전날의 패전을 만회하려고 용을 쓰고 난리를 죽이지만, 어리석은 짓이란 것을 곧 알게 된다. 이번 수군을 보면, 조선 여러 도의 전 해안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원수를 갚을 욕심이 강했고, 또 일본군이 전사한 것을 위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네, 일본 수군이 연전연패한 사실이 일본 전국에 알려지자 민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일본 전국을 지배하는 히데요시는 위신을 세우기 바빠 제2차 수군 10만 명을 재편성해서 공격하게 했습니다.”

“하하! 대부분 사람들은 본전을 생각하다 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와 같이 본전을 찾으려는 히데요시의 뜻대로 조선의 수군이 만만할까?”

“아닙니다. 이순신장군이 있는 한 용납되지 않는 것이지요. 일본 수군이 경상도 해안에서 연전연패하였다는 사실이 조선 왕궁을 차지한 대장 부전수가는 팔을 걷어 부쳐가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 우끼다 히데이에란 자는 히데요시의 부하 중에서 유일한 명장으로 용병이 귀신같아서 지위가 재상에까지 올라간 장수가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이순신 하나를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 일본군의 수치를 어찌 씻으리오.’

라고 말하며 한양에 있는 여러 장수를 4부대로 편성하여 통솔하고 부산과 양산으로 내려와 협판안치 이하 제장들과 합류하여 함대를 출동하였다.”

“네, 한편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대함대가 부산에 건너왔다는 놀라운 보고가 이순신장군의 좌수영에 들어온 것은 6월 말 일(1592년 8월 6일=丁未월, 丁巳일)이었습니다.”

“인생이란 참 묘한 것으로서 이순신장군의 天敵인 글씨가 丁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제2의 일본군이 무려 10만 명으로 수전에 참가한 것을 봐라 丁월에 丁일에 발생하였다.”

“네, 그런 것을 보면서 역학의 위대함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터라 곧 관하 제장들에게 영을 내림과 동시에 수륙 양로로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관문을 보내 7월 7일(1592년 8월 13일, 戊申월, 甲子일)을 기약하여 노량목에 모여 제3차로 적의 수군을 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음! 드디어 한산대첩이 기다려지는구나! 이순신장군이 당시에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1592년 7월 19일=유월 열하루=己亥일부터 1592년 9월 28일=팔월 스무사흘=庚戌일까지 73일 동안 난중일기를 쓰지 않으셨다. 이 기간에 저 유명한 한산대첩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네, 음력 7월 초이레를 기다리는 동안 혹은 가덕에 적선이 10여 척이 나왔다하고 혹은 거제근해에 적선 30여 척이 떴다는 첩보가 들어올 뿐만 아니라 남해도의 남단인 금산포까지 적선이 출몰한다는 것을 좌수영의 탐망선이 발견하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거의 본영을 버리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비겁한 장수들은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장군은 선조의 가마가 서울을 떠난 것, 임진강에서 패한 것과 개성을 버리고 평양을 지키라는 소식까지 들었으나 그 후의 일은 아직 듣지 못한 상태였다.”

“네, 장군은 아군의 패보를 들을 때마다 서쪽으로 향하여 통곡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도 조선에 사람이 없는가! 이렇게도 조선 사람은 못난 사람인가!’

라고 탄식을 그치지 못하시고, 조선 팔도 중에 7도가 적의 손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오직 전라도 하나뿐이었으니, 이마저도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조선의 강토는 끝장이 나는 것을 한탄하시며 적의 수군이 전라도 바다를 지나지 못하게 할 것을 하늘에 대고 맹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