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가치는 ‘활용도’가 결정한다. 원작 그대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다른 표현법의 활용가치가 있어야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활용이 가능하려면 단순한 콘셉트 한 가지를 넘어 다양한 표현법의 접근이 가능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 수요자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는 장수 콘텐츠들은 분명히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콘텐츠의 활용 가치를 만드는 힘. ‘세계관’이다. 오늘은 최근 두 가지 콘셉트의 모바일 게임으로 출시되면서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는 게임 ‘리니지(Lineage)’의 원작 만화와 홍콩 느와르의 새로운 획을 그은 영화 무간도(無間道)의 세계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 출처= 각 게임 공식 홈페이지

리니지 “전설의 시작은 사랑 이야기”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한때 사회 현상으로까지 회자되던 PC 온라인 게임의 전설 ‘리니지’의 원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화 작가 신일숙 씨의 장편 만화 ‘리니지(1993)’다. 1998년 당시 엔씨소프트 송재경 대표(現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를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고, 만화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후 송재경 대표는 작가를 찾아가 만화의 스토리를 게임에 활용하고 싶다고 제안하나 신 작가는 극구 반대한다. 그러나 송 대표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콘텐츠의 활용에 동의했고, 그렇게  동시 접속자 수 1000만명의 게임 ‘리니지’가 탄생했다.    

게임에 사용된 지명(地名), 캐릭터의 직업, 인물, 배경, 화폐 단위 등은 모두 만화 리니지에서 쓰였던 콘셉트들이 그대로 사용됐다. 리니지의 배경은 봉건제도가 정립된 중세 유럽 시대와 북유럽 신화의 판타지 세계관이 접목된 가상의 공간이다. 원작 만화의 시점은 특정 시대에 고정돼있지만, 작품에는 세계가 창조되는 이야기가 담긴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과 다양한 종족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등의 역사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는 영화 <반지의 제왕>과 <호빗>이 큰 틀의 세계관 ‘실마릴리온’ 속 특정 시점을 이야기 한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 출처= 학산문화사

만화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주된 배경은 ‘아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국이다. 아덴 왕국의 왕은 자신의 외동딸을 왕국의 젊은 기사 ‘듀크데필’과 결혼시키고 그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러나 듀크데필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데포로쥬’를 남겨둔 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듀크데필의 사촌임을 주장하는 기사 ‘켄 라우헬’이 등장하고 왕비는 그에게 반해버린다. 왕비는 자신의 아들인 데포로쥬 왕자가 16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준다는 조건을 내걸며 왕자를 궁 밖의 세상으로 내보낸다. 데포로쥬 왕자는 왕좌를 차지하고자 한 켄 라우헬의 암살 위협을 받으나 자신의 아버지 듀크데필을 따랐던 ‘혈맹’들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고, 이후 어른으로 성장한 데포로쥬는 자신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왕국과 켄 라우헬에게 반격을 시작한다.    

스토리상 선악을 구분하자면 켄 라우헬이 악(惡)역, 데포로쥬를 선(善)역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사이에는 자신의 아들까지 외면하게 한 왕비의 격정적 사랑, 어머니가 사랑하는 이와 대립해야 하는 왕자의 슬픈 운명 등 복잡한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처럼 리니지 원작은 방대한 판타지 세계관과 치정(癡情), 그리고 복수와 회복의 스토리텔링이 얽혀있는 수작으로 처음 나온 지 20여 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국내 게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대작의 원 소스로 남아 있다.  

 

무간도 “누아르의 틀을 깬 새로운 누아르” 

80년대 말~90년대 초 아시아권 국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홍콩 누아르’ 영화들은 일종의 공식이 있었다. 폭력조직과 경찰의 대립, 그리고 목숨을 건 남자들의 우정이다. (주로)미남형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해 그들만의 끈끈한 의리(소위 브로맨스라 불리는)를 공유했고, 이는 홍콩 누아르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로 내비쳐졌다. 우리나라 영화계도 이 영향으로 한 때 수많은 인기 영화들에서 ‘조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과거의 홍콩 누아르식 스토리텔링은 이제 식상한 소재가 돼버렸다.  

▲ 무간도 1,2,3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게 사람들의 인식에서 잊혀져 가던 홍콩 느와르의 틀을 깨며 느와르 영화의 새로운 패턴을 제시한 스토리가 있었으니 바로 영화 ‘무간도(無間道)’ 시리즈다.

무간(無間)은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줄임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지옥 중 고통이 가장 극심한 지옥을 의미한다. 영화는 제목부터 지옥에 가까운 고통을 말하며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암시한다. 기본 스토리는 이렇다. 중국 경찰은 중국 내 최대 폭력조직인 삼합회의 소탕을 위해 경찰 신분을 숨긴 스파이 진영인(양조위)을 삼합회 일원으로 심어놓는다. 한편, 폭력조직 삼합회는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경찰로 위장시킨 조직원 유건명(유덕화)를 스파이로 심어 놓는다. 서로는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철저한 폭력조직원, 그리고 경찰로 살아간다. 그러나 서로 간의 얽힌 관계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본래의 신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두 주인공들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 무간도의 스토리를 모티브로 한 영화 <디파티드>와 <신세계>. 출처= 네이버 영화

무간도에서는 전통적 홍콩느와르에서 강조됐던 브로맨스나 권선징악은 찾아볼 수 없다. 경찰과 삼합회 어느 쪽에도 정의는 없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는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무간도는 속편을 통해 전편의 프리퀄 스토리, 그리고 3편을 통해 그간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을 해결하며 이야기의 결말을 짓는다. 

무간도의 콘셉트는 헐리우드에서도 주목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디파티드(2006)>로 탄생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무간도의 콘셉트를 모티브로 한 영화 <신세계(2012)>가 만들어지면서 무간도는 영화로써 다른 영화의 원 소스가 되는 이례적 작품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