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나라가 부역자라는 말을 자주 썼나요? 그런데 요즘은 온통 부역자 투성이입니다. 어딜가나 부역자가 넘쳐요. 독재정권당시 빨갱이 타령도 아니고...뭔다 다들 미쳐가는 느낌입니다"

 

“원래 우리나라가 부역자라는 말을 자주 썼나요? 그런데 요즘은 온통 부역자 투성이입니다. 어딜 가나 부역자가 넘쳐요. 독재정권 당시 빨갱이 타령도 아니고… 뭔가 다들 미쳐가는 느낌입니다.”

최근 술자리에서 들었던 한 기업인의 푸념이다. 깊은 한숨만큼이나 잿빛으로 가득 찬 술잔을 쓰게 넘기며 ‘부역자라니’라는 말만 뇌까린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일견 동의한다는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은 많지만 참기로 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부역자. 하긴, 요즘 부역자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부역자(附逆者) 전성시대다. 처음에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모든 콘텐츠가 붕괴되며 사람들이 하루 4시간 동안 보는 뉴스에는 온통 부역자 이야기로 넘쳐난다. 이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음모론들이 마치 깜짝선물처럼 폐부를 찌르고, 우리는 분노를 패스트푸드처럼 소비하고 있다. 맞다. 부역자를 가려내는 일은 중요하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주모자와 이에 동조한 부역자를 끊어내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냉정함이다. 특히 현 정부의 창조경제 전반에 비선실세의 어두운 입김이 스며들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부역자를 가려내는 눈동자가 성급한 분노로 뒤덮이는 것이 우려스럽다. 윗 물이 탁해졌으니 아랫물도 탁해졌고, 아랫물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단순한 연결고리만으로 부역자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적인 사례를 스타트업 업계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입주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각에서 부역자라고 의심받는 장면이 극적이다. 비선실세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이제 우리 아파트 동대표도 최순실 측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는 농담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창조경제와 스타트업의 교집합을 무조건 색안경 끼는 시각이 크게 늘어났다.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은 부역자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가려내고 보호해야 한다. 나아가 원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자생할 수 있는 업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이다. 몽상 같은 이야기지만 창조경제라는 어설픈 개념을 완전히 부수고 원점에서 업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모든 혁명은 꿈과 몽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최근 O2O 플랫폼 서비스를 출시했다는 스타트업 대표가 만남을 요청해왔다. 바쁠 것 없는 처지지만 나름 숨 가쁘게 달리고 있어 서로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1990년생이라고 설명한 그는 12월 초 서비스를 시작한 초보 스타트업 대표였다. 업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기자로서 생각한 스타트업의 비전 일부를 어설프게 알려줬는데 그 과정에서 지금도 뇌리에 선명한 말을 들었다. “정부 지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는데, 약간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에 하나 최근 업계에 일렁이는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걱정한 것이라면, 나는 그가 아닌,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릴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부역자라는 꼬리표는 바람처럼 펄럭이는 가벼운 깃털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다. 당신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