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자기 스스로 많은 흠을 갖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한 왕으로 적어도 내 자식만큼은 그런 결점이 없는 왕이 되어주기를 바랐고, 그것이 사도세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봉착해서 참을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도달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놓고 여러 차례에 걸친 양위선언으로 세자를 불안에 떨게 한 것만 보아도 세자가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대에 건강한 군주가 살아있으면서 세자에게 양위를 선언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세자에게는 불충과 불효의 상징이 되는 것이고, 신하들에게는 불충의 표징이 되는 것임으로 어떻게든 양위선언을 철회하게 만들기 위해서 석고대죄를 비롯한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대리청정을 통한 세자와 신하들, 특히 당시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있던 노론과 세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에 대해 영조는 나름대로 강수를 두었을 것이고 세자는 그에 따른 엄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세자는 울화병이 걸린 정도였고 그 화를 진정시키는 한 방편으로 취한 행동들이 때로는 병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한 정신병자의 행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말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영조 자신이 아닌 바에는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지만, 모름지기 가장 타당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주장으로는, 사도세자가 영조에게는 말도 없이 평안도를 다녀온 것이 가장 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때 만일 사도세자가 서인들을 대동하고 영조에게 보고한 후에 갔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때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소론과 남인 등과 함께 평안도에 다녀왔으니,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때 소론은 물론 남인과 심지어는 여승까지 동반하고 평안도에 다녀왔다고 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노론의 부당한 정치 행태에 맞선 사도세자가 반란을 획책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반역을 획책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남들 눈에 보이라고 광고하듯이 평안도에 다녀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또한 노론의 행태가 아무리 눈꼴사나워도 자신이 왕이 될 날까지 적당한 선에서 다스리다가 왕이 된 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아니다.

사도세자가 남들의 눈에 띠든 말든 신하들과 여승까지 대동하고 평안도에 다녀온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론 측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음대로 평양을 다녀오고 운운 했지만, 그것을 그들이 사도세자를 험담하기 위해서 말했듯이, 평양기생과 놀아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여승을 입궁시킨 것 역시 단순히 여승들과 성적인 유희를 위해서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객관적인 역사의 기록이 밝혀주었던 바와 같이 사도세자는 매우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파당에 얽히고설켜서 백성들의 안위나 행복을 지켜주기는커녕 집권자들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당시의 정국을 타개위해서 어설픈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할아버지 숙종의 환국정치나 아버지 영조의 탕평책 같은 정치는 일시적으로는 안정을 찾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피바람만 날리는 파당싸움을 끝낼 수 없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환국정치나 탕평책이 아니라 왕이 병권을 손아귀에 쥐고 대신들을 호령할 수 있는 절대 왕권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절대 왕권을 손에 쥔 후에는 북벌을 단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이라는 좁은 틀에 얽매여 백성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짓을 떠나서 더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소위 삼종혈맥으로 불리는 효⦁현⦁숙종의 효종의 업을 이어받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