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2 9898’ 삐삐를 받고 공중전화를 찾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한 손으로 들기도 버거운 휴대전화가 수백만원을 호가했었다. 벨소리가 16화음인지 36화음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어느덧 폰과 카메라가 한 몸이 됐다. ‘터치폰’을 젊음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약정이 끝나기도 이전에 스마트폰이 몰려왔다.

불과 20여년 간의 스토리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간다. 과학 기술의 발전, 환경의 변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요구 등 많은 것들과 맞물린 결과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이나 불만 없이 흘러가는 시계바늘 위에 몸을 맡겼다.

‘탈 것’의 역사 또한 비슷하다. 마차가 다니던 도로 위를 자동차는 불과 수십년만에 접수했다. 이동수단에 불과했던 차가 어느덧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명령을 수행하는가 하면 안전 운전을 위해 자동차가 스스로 주행 환경을 조작하는 시대다.

2016년 현재 자동차 산업은 또 한번 큰 변화의 기로에 섰다. 유해가스 배출이 없는 친환경차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해진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대륙을 덮친 스모그와 설 곳을 잃은 북극곰이 던지는 메시지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석유자원은 유한하다.

전기차에 이목이 모이고 있다. 내연기관차를 대체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BYD, 테슬라 등 선두 업체가 존재한다. 현대차를 비롯해 도요타, GM, 폭스바겐 등 완성차 회사들도 해당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가 있다. 아직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 100여년간 갈고 닦은 내연기관차의 내공을 따라가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짧은 주행거리, 부족한 충전 인프라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다. GM 볼트(Bolt)와 테슬라 모델3 등 ‘2세대 전기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300km가 아니라 900km를 달릴 수 있다 해도 충전하는 데 30분 이상 소요된다면 내연기관차와 경쟁에서 승리하기 힘들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배터리 기술력에서는 ‘혁신’이 요구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집중하고 있는 일은 전기차 안에 많은 배터리를 넣어 주행 거리를 늘리는 것이다. 테슬라도 마찬가지.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고 있는 단계다. 리튬이온배터리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가 남았다.

더 큰 문제는 가격이다. 전기차는 동급 내연기관차 대비 가격이 두 배 가량 비싸다. 아직 기술 개발 초기 단계인 탓이다. 삐삐 역시 1980년대 후반에는 약 20만원을 줘야 살 수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는 만원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진 바 있다. 구매 장벽이 낮아진 뒤 국내 삐삐 사용자가 2000만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전기차 보급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환경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전기차를 타겠다는 사람도 있다. 제주도는 ‘탄소없는 섬’을 만들기 위해 202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지점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는 전기차 구매자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방안을 내놨다. 가장 기본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수천만원을 지원해준다. 물론 ‘혈세’다.

의문을 가져야하는 대목이다. 전기차가 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모순되게도 지금 시점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차는 아니다. 한전 전력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에서 생산되는 전력 중 64%는 화력, 31%는 원자력 발전을 통해 나온다. 당장 도로 위의 차를 모두 전기차로 바꾼다면 화력·원자력 발전소는 더욱 펑펑 돌아갈 것이다.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정책에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법. 전력 생산 방식을 바꾸지 않은 채로 무작정 전기차 보급만 늘리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삐삐 사용자에게 갑자기 4G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꼴이라는 지적이다. 통신망도 없고 충전 케이블 찾기도 힘든 환경에서 말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기차 시대의 ‘교두보’가 필요한 상황.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가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가솔린 엔진과 전기 모터를 한 몸에 품은 것이 이 차의 특징이다. 충전기를 연결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다는 점이 하이브리드차(HEV)와 다른 점이다.

한계가 명확한 대신 장점도 확실한 차다. 쉐보레 볼트(Volt)의 경우 전기 모터만으로 약 90km 가량을 달릴 수 있다. 출퇴근 시 활용한다면 기름 한 방울 없이 주행이 가능한 셈이다. 주말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는 가솔린 엔진을 활용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다. 주행거리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PHEV 보급이 활성화되면 충전 인프라 문제도 일정 부분 해결된다. 친환경차 문화 저변 확대에도 도움을 준다. 전기차 시대로 넘어가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다. 전력 생산 방식을 신재생에너지 위주로 바꾸는 ‘체질개선’을 위한 시간을 벌 수도 있다.

아쉽게도 우리의 혈세는 다른 곳에 쓰이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에 수천만원씩 세금을 바치고 있지만 PHEV 보조금은 쥐꼬리만도 못한 수준이다.

한국의 삐삐 사용자들은 스마트폰 이전에 폴더폰을 접해볼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기술 개혁과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환경 인식 개선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틀 안에 뒀을 때 얘기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다. 전기차로 시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그 과정을 보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당장 국내 전력 생산방식에 큰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과 전기차의 기술 경쟁력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두 가지 고민이 맞닿은 부분에 PHEV가 있다. 어쩌면 PHEV가 ‘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