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왕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갈아치우던 양반⦁사대부들의 횡포에서 왕권을 강화한 조선 중기 이후의 보기 드문 왕이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인 현종이 재위시절 내내 신하들에게 휘둘리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병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씀과 동시에 남인과 서인의 권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남인의 권력을 빼앗아서 서인에게 주었다가 서인의 권력을 빼앗아 남인에게 주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환국정치를 통해서 서남당쟁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그러나 그 당파를 이용하던 배경에는 모름지기 인현왕후와 장옥정에 대한 애증의 교차로 인해 두 사람을 각각 지지하던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과 남인에 대한 권력의 향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특히 장옥정에 대한 애증은 숙종이 권력향배를 정한 막판의 사건인 갑술환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거나, 갑술환국이 장옥정에 대한 감정을 바뀌게 했을 수도 있다. 갑술환국의 흐름을 읽어보면 그런 짐작을 할 수 있다.

1694년(숙종20) 3월 29일에 유생 김인이 당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장옥정의 오빠인 장희재와 민암이 반역에 연루되었으며, 장희재가 숙빈 최씨를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다고 고발했다. 장희재와 민암은 숙종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였으며 숙종은 김인의 고변이 허황되어 믿지 않는다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1일 숙종은 돌연 마음을 바꿔 민암 등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에게 다시 정권을 준다. 당시에는 음력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음력 3월 29일의 다음날이 4월 1일이다. 돌연 하루 만에 마음이 바뀐 것이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숙종실록 4월1일 2번째 기사에 사관이 첨부한 사론(史論)에 [영의정 권대운 등 15명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고, 우의정 민암 등 5명은 모두 절도에 안치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남인들이 대거 몰락한 것을 알 수 있다.

갑술환국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의 죄상을 고변한 것으로 인해서 시작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갑자기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결단을 내린 원인을 이거다 하고 꼬집을 수 없다는 것이 사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숙종 스스로 폐서인 시킨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한 자들에게 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정국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추측을 하자면 앞의 사론에 [수인의 공초 가운데에 익평·청평·인평 세 공주를 죽인 뒤에야 남인이 무사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공주의 집 운운하는 분부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첨부된 것으로 보아, 선왕의 세 공주까지 희생물로 삼으려는 남인들의 행패를 그냥 두었다가는 서인들이 일거에 몰락하고 남인천하가 되어 왕권마저 위협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장옥정의 오라비인 장희재에 대한 처리다. 갑술환국이 발발한 4월 1일, 남인이 대거 엄형을 받고 출척되는 상황에 민암과 오랜 친분이 있어온 장희재는 스스로 죄를 청하였으나 숙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라며 위로하였다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4월 11일, 숙종이 돌연 장희재에게 이시도의 죄를 조정에 품하지 않고 사사로이 처벌한 것에 대한 죄를 물어 유배함과 동시에 이미 폐비가 된 인현왕후의 입궁에 대하여 예조와 논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2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하고 장옥정에게는 옛 관직인 희빈을 제수할 것을 명하면서, 숙종실록 20년(1694) 4월 12일 6번째 기사에 아래와 같은 여운을 남긴다.

“국운이 안태를 회복하여 중곤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는 폐하지 않도록 하라.”

장옥정을 중전의 자리에서 내치고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원하면서도 장희빈에 대한 세자의 조석 문안은 지키라는 것이다. 장희빈이 세자의 생모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숙종이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두 당파간의 세력균형을 맞춰온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숙종의 갑술환국이 고도로 계산 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남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서인에게 주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마음속으로만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김에 있어서는 일거에 칼로 두부 자르듯이 내리쳤다. 마찬가지로 여차하는 날에는 언제 또 서인을 내치고 남인에게 자신의 향배를 돌릴지 모른다는 여운을 세자를 통해서 남긴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