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겨짐-phenomenal, 92×64㎝ 한지에 아크릴과 크레용

 

“예술가는 카오스로부터 다양성들(Varétés)을 갖고 온다. 그것은 더 이상 기관 내에서 감각의 재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되돌릴 수 있는 비유기체적 구성의 구도상에서 지각의 존재, 감각의 존재를 세운다. (중략) 화가는 참변이나 격정을 겪어내며, 이러한 추이의 과정을, 마치 카오스로부터 구성의 구도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도약의 궤적처럼 캔버스에 남긴다.”<철학이란 무엇인가/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지음/이정임, 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푸르른 밤하늘이다. 수많은 별들은 길고 밝은 선을 그리며 사과들의 주위를 맴돌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희미한 움직임들은 춤을 추듯 살아 숨 쉰다. 사과가 가져다주는 깊은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인가. 함께 호흡하며 공존의 기쁨을 나누듯 생명체들은 나래를 편다.

하지만 사과는 아무런 상념 없이 스스로의 고고한 자태를 뿜어낼 뿐이다. 울렁이는 물결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어울리고 싶어’라며 속삭이지만 그럴 수 없음에 더욱 더 힘껏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이다. 상반되는 하늘과 바다….

 

▲ 92×64㎝ 한지에 연필, 아크릴과 수채물감

 

갈등과 고민의 요동 속에 물결은 붉게 상기되고 불안정한 심리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그런 때 둥글게 선을 그리며 마치 ‘모두 잘 될 거야’라고 최면을 걸 듯 검푸른 밤하늘은 가볍게 포옹하며 포근하게 토닥여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사과는 무(無)에서 유(有)로 점점 변해가며 어느새 ‘나’만의 독특한 그 찬란한 우주의 중심자로서 환골탈퇴의 환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독한 시간 속 혼자가 아님을 무언의 믿음으로 깨닫게 해주며 잔잔한 바다 물결 위에 빛을 발하고 있는, 오오 천공을 부유하는 사과여!

 

▲ 75×144㎝ 한지에 수묵, 아크릴과 크레용

 

◇한지, 언제나 처음의 설렘

화면엔 한지를 닮은 듯 한 연필이 주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이 흐른다. 연필의 생생함을 그대로 살린 화면은 거침없이 내뿜는 숨소리 같은 선들을 마냥 드러낸다. 수많은 흔적들이 삶의 기억처럼 때론 아주 생생하게 떠오르듯 무채색 위 연필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버린다.

한지위에 아크릴과 크레용, 연필, 수채물감, 먹 등의 물성을 운용하는 작가는 각각의 재료들이 한지와 조화를 이루는 작업과정에 대단히 흥미로운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얀 한지 위에 아크릴의 무채색으로 사과를 그려 나가면 바다위의 잔잔한 물결도 마치 아무것도 없던 처음 같이 연필의 흔적들을 올려놓는다. 매번 온힘을 다해 선을 긋고 있으면 나도 연필과 한 몸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한동안 작업을 하면 어느새 짜리몽땅한 연필이 되지만 그 숨결은 고스란히 남아있다”라고 했다. 그는 한지 뒷면에도 맑디맑은 수채화 물감으로 투명함을 더하는데 마치 신세계를 만난 것 같은 전율이 순간 밀려든다고 했다. 그런가하면 춤추듯 움직이는 크레용의 느낌과 그 뒤를 받쳐주는 은은하고 깊이 있게 우러나오는 먹물의 묵직함도 독특한 미감을 선사한다.

한지작업의 기쁨을 작가는 이렇게 전했다. “한지가 주는 투명함과 앞면과 뒷면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비로움이 가히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리들이 꼭 앞만 보고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회상에 잠기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