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부레옥잠,(아래)꽃창포, 41×33㎝, 순지에 채색물감, 2004

 

“누가 가장 아끼던 것을(誰把中書物) 산 아래 시내에다 심었나보지(今於山澗栽). 신선이 단장하는 맑은 물아래(仙粧明水底) 어조(魚鳥)도 놀라서 시샘을 하네(魚鳥亦驚猜).” 《문학의 산실 누정을 찾아서Ⅰ-식영정(息影亭)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시 ‘배롱나무 꽃 핀 여울(紫薇灘)’, 이강로 장덕순 이경선 공저, 시인사》

 

뜨락을 내려서면 두 그루 석류나무가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었다. 그 옆엔 중심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석물(石物)이 하나 있었는데 꽤 크기가 있어서 여름비에도 쉬이 넘치지 않고 한참을 버티곤 했다. 바로 부레옥잠의 거처였다. 잎자루 아랫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햇빛의 방향에 따라 진녹색 빛이 더욱 진하게 보여 앙증맞고 자꾸 보면 애교덩어리 같이 참 귀여운 데가 있는 생김새였다.

여름날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진 후 물이 차오르면 부레옥잠은 훌쩍 키가 큰 모습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 훨씬 크게 다가왔다. 오뚝이처럼 물에 곧게 서서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듯 보이는 부레옥잠의 그 고고한 자태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 오기도 했었다.

 

▲ 화조도, 41×33㎝, 장지 위 수간채색과 분채, 2007

 

특히 비 그친 다음날 눈부신 햇살이 잎으로 쏟아지면 그 아름다운 빛깔은 내 가슴을 온통 초록물결로 물들이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선명한 너무도 황홀한 찰나의 풍경기억 하나가 있다. 석물 속 혹은 가까운 곳에서 먹잇감을 구하여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가 가속을 붙여 수평의 몸짓으로 날아가는 그 순간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던 그 부레옥잠의 휘둥그레 하던 커다란 동공을!

 

▲ 靜中動-꽈리, 73×60㎝, 순지 위 채색, 2005

 

◇청순하고 아담한 노래

울타리 옆 꽈리는 언제나 설렘을 품은 청아한 심상의 풀이었다. 사모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심처럼 그렇게 수줍어 달아오른 듯 초롱같이 빨간 꽈리주머니를 달고 바람이 불때마다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속삭이며 흔들리곤 했다. 동네 꼬마들은 꽈리가 빨갛게 익는 계절엔 씨를 빼내고 공기를 불어넣어 꽉꽉 소리를 내어 불며 재롱을 부리고 동네를 몇 바퀴씩 돌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열매를 말려 벽에 장식처럼 매달아 가을이면 아련한 기억들을 일깨우는 순수시대의 목록이 되어주기도 했었는데 남달리 붉게 물든 황혼이 질 때면 그 빛을 받아 더욱 불그스름 빛나는 꽈리는 아담하고도 아늑한 빛깔의 열매봉오리를 드러내 한 참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았다.

 

▲ 석류, 73×50㎝, 2006

 

석류는 참 뜨거운 열매다. 껍질 속에 예쁜 구슬 같은 씨앗이 가득 들어있어서 다산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마치 보석 같이 붉게 익은 석류는 형제자매들이 많은 우리가족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다.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와 작은 언덕의 동산으로 오르면 도라지 밭이 비스듬히 펼쳐져 있었다.

 

▲ 도라지꽃, 73×60㎝, 2004

 

연한 안개가 깔려 있는 날, 꽃봉오리가 동글동글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꽃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청자색깔을 가진 보라색 꽃이 만발한 때 아침이슬이 맺혀있는 것을 보면 나 홀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환상적인 경험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안개가 낀 날은 자주 도라지 밭에 가곤 했다. 그런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가슴 벅찬 희열을 나에게 전하는 귀엽고 사랑스런 청순한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