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2년 여름 전력예비율이 떨어지자 최각규 당시 경제부총리가 공공건물 에어컨 사용 전면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전국 공무원들은 사상 유례없는 혹서를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공무원들은 뜨건 바람만 내뿜는 선풍기 몇 대와 부채에 의존해 긴긴 여름날을 보냈다. 최 부총리도 종일 부채를 들고 집무했다. 낮 시간 더위 먹은 공무원들이 속출하면서 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야근자가 늘었다. 과천 정부청사에는 선풍기 앞에 얼음 채운 세숫대야를 놓는 일명 ‘얼음선풍기’까지 등장했다. 당시 전기절약 캠페인은 일반 국민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앞장서서 벌였다. 일부 대기업과 금융기관 정도가 에어컨을 수시로 껐다 켜며 정부 눈치를 살폈을 뿐이다.

그로부터 24년, 또다시 온 나라가 폭염 속이다. 올해는 평년보다 두 달 이른 5월부터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7월부터는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대응은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낮 동안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 가정주부나 노인, 그리고 장애인 등 취약계층은 선풍기와 부채로 버틴다. 경로당은 ‘무더위 쉼터’라는 푯말이 무색할 정도로 덥다. 전 국민의 80% 이상이 갖고 있다는 가정용 에어컨은 켜기가 두렵다. 누진제로 인한 ‘전기료 폭탄’ 때문이다. 반면 일반 상업용 건물처럼 공공건물에서는 냉방병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누진제는 개발도상국 시절이던 19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도입됐다. 각 가정이 전기를 아껴 산업체의 생산 활동 차질을 막자는 애국적 취지였다. 그런 누진제가 경제대국이 된 지금도 살아 있다. 2007년부터 운영 중인 6단계의 누진요금 체계에 따르면 1단계 대비 6단계 요금은11.7배나 비싸다. 일본의 경우 총3단계에 최저요금 대비 최고요금이 1.5배에 불과하고, 미국은 3단계에 1.6배, 캐나다는 2단계에 1.5배 수준이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아예 누진제가 없다.

과도한 누진제에 대한 국민 불만이 폭증하는데도 전기요금 조정에 대한 승인권을 쥔 주무부처 산업자원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어컨을 하루 4시간 이상 켜지 않으면 전기료 폭탄이 없다며 오불관언이었다. 저소득층을 위한 누진제를 변경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거나, 누진제 완화는 부자감세로 이어진다는 등 이해 못할 해명도 내놓았다.

전기는 사치품이 아니다. 누진제가 도입될 당시와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산업 환경이나 에너지 여건이 변했다. 이에 따라 가구당 월평균 전력사용량은 1998년 163kWh에서 2014년 226kWh로 증가했다. 전력 소비량이 300kWh를 초과하는 가구 비중도 같은 기간 5.8%에서 28.7%로 5배 가까이 늘었다.

전기는 이제 생활 필수재다. 더욱이 전기 사용량은 소득 수준보다는 각 가정의 구성원 수, 장애인이나 환자 등 전기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성원의 재택 유무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량에 따른 누진제가 소득재분배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산자부는 누진제가 완화·폐지될 경우 전기사용량의 증가로 전력난이 우려된다지만, 가정용 전기의 비중은 전체의 13.6%에 그친다.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는 산업용은 56.6%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대기업에 대한 원가손실액(전기 생산비용 대비 적정 전기요금을 받지 못해 발생한 손실액수)이 5조원이 넘으면서 누진제는 대기업 특혜가 아니냐는 비판도 들린다.

서민들이 전기요금에 전전긍긍하는 사이 한전은 막대한 수익을 기록 중이다. 한전은 전력판매를 독점하는 공기업이다. 1961년 설립돼 발전 5사의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기를 구입한 뒤 공장과 가정 등에 되판다. 독점 판매는 막대한 이익을 보장한다. 실제로 한전은 지난해 11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린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수익이 6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국가가 굳이 민간진입을 막아 한전에 시장 독점을 허용해준 것은 서비스의 안정성을 위한 것이지, 국민들 상대로 최대한 수익을 올리라는 것은 아니다.

폭염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야 청와대와 정치권이 누진제를 손보겠다고 나섰다. 한전의 전기요금에 대해 승인권한을 갖고 있는 정부도 등 떠밀려 임시변통에 가까운 대책을 내놓은 모양이다.

24년 전 공무원들의 ‘얼음선풍기’를 지켜 보며 흔쾌히 전기절약에 동참했던 국민들로서는 요즘 공직자들의 안이함에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