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실험적 가설로 홍길동은 조선시대 사람이 아니라 고려시대 사람이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사회적인 배경 등을 종합해볼 때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홍길동전>이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소설은 아무리 사실을 근거로 한다고 해도 허구다. 허구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실록이거나 교과서일 뿐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나, 혹은 자신의 인생관을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시대적인 배경을 얼마든지 바꿔서 설정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소설에서 마찬가지다. 아무리 역사 소설이라고 해도 역사적인 사실은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무대 자체가 그 소설에서 묘사되는 시대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도 시대적 상황을 독자들이 읽는 그 시대와 조화롭게 각색하는 것이 작가로서는 일종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조선시대의 모순된 계급사회라는 사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쓴 <홍길동전>이라면 당연히 적서의 차별이 심하고 탐관오리들의 부패가 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무대로 하지 않으면, 작가 자신의 인생관을 펴기 힘들었기에 무대를 조선으로 설정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홍길동이 조선 사람이 아니라 고려 사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대마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마도는 1246년에 종중상이 아비류군을 토벌하고 초대 도주가 된다. 종중상은 원래 우리나라의 송씨로, 대마도로 건너가면서 종씨로 성을 바꾸고 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1740년에 기록된 <동래부지>를 통해서 2012년에 황백현 박사가 밝힌 바 있다.

종씨 가문에 세습된 대마도주는 1869년 대마도 판적봉환에 의해 대마도의 영토권을 일본이 강제로 탈취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하자면 홍길동이 연산군 시절인 1400년대의 사람이고 율도국이 대마도에 세워진 나라라면 대마도의 역사와 맞지 않는다. 중간에 대마도주가 홍씨로 바꾸거나 아니면 도주 없이 국왕이 생겨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고려시대도 조선처럼 계급사회였을까 하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왕족을 비롯한 5품 이상의 관리들은 귀족이라고 했으며 이들은 공작새를 키우며 살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이들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었고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음서제도를 통해서 벼슬을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모든 백성들 중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채 1할도 못 되는 적은 숫자지만 그들이 나머지 9할의 백성들을 쥐어짜며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 아래 계층은 소위 중류층이라고 불리는 지방 관리나 하급 장교들이었지만 그 역시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두 계층이 지배계급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인원을 점유하던 계층은 양민이라고 부르는 층으로 농민이나 상인들이었고, 그 다음이 사공이나 백정 같은 천민들이었는데 천민 중에 가장 수가 많은 천민은 노비였다.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어 노비의 자식들도 노비가 되었는데, 부모 중 하나만 노비인 경우에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으니 노비의 숫자는 점점 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두 계층이 피지배 계급에 해당하였다.

지배 계층, 특히 그중에서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문벌을 확대하기 위해서 토지 소유를 늘려 부를 키우는 한편 가문 간의 전략적인 결혼을 통해서 점점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당연히 피지배계급인 양민이나 천민들은 귀족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의 뒤치다꺼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골품제도처럼 꼼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비록 귀족이 될 수는 없었지만 지방의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관료가 될 수 있었고 공민인 양인의 농민들도 명경과나 잡과에 응시하거나 군인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 역시 신분이라는 사회제도가 철저하게 불평등한 세상구조를 만들었다. 홍길동이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것도 노비 어미에게서 태어났다면 노비 신분이 되는 것이니, 조선의 서자로 태어난 것보다 더 설움을 당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처지의 홍길동을 조선으로 옮겨 놓는 것은, 작가로서는 시대상황을 설정하기 쉬운 인물 중 하나였음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