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야구경기에서 지고 있는 상황 9회말 2아웃이 됐을 때, 캔디 만화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구절이 생각날 때. 이쯤 되면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누군가 그랬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가 바로 성장과 발전의 기회라고. 올올이 맺혀 있던 그 시련의 매듭을 풀어버리고 떡에 두 번째 인생을 건 사나이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 당신이 보는 건 단란한 가족의 자화상이다. 다부지고 단단하고 정직한 그들이다. 석창근(60)씨 가족에게 떡은 소통과 생활의 수단이요, 사랑의 매개체다. “원래 쌀 한 번을 안 씻어 봤어요.

떡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집사람이 떡 만드는 걸 배워보라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죠. 떡과 열심히 마주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 좋아지더라고요.” 말투에서 특유의 무심함과 투박한 정감이 묻어난다.

그랬다. 떡에 무심하던 경상도 사나이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떡과 알콩달콩 인연을 맺었다. 남은 인생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기로 했으니 백년가약을 맺은 셈이다. 대기업 기술자에서 떡집 아저씨로 제2의 삶을 시작한 그. 그런데 그의 떡사랑이 내리사랑으로 이어졌다. 갓 쪄나온 따끈따끈한 떡만큼이나 똘똘 뭉친 가족애가 뜨끈뜨끈하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떡은 한약과 같더라고요.
어느 한의사 밑에서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떡도 장인에게 배워야 제대로 기술을 익힐 수 있어요.

우리쌀로 만든 건강 떡 젊은층에 인기

‘엄마가 직접 삶은 국산팥’ ‘방수 삼남매’ 입간판의 글귀만 봐도 가족적이고 정겹다. 서울 도곡동의 떡 카페 ‘떡찌니’. 이 일대에서 저렴하면서도 맛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15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에 테이블 몇 개와 커피 및 와플 기계를 갖춘 조그만 주방이 딸려 있다. 여기가 떡집 맞나 싶을 정도로 빨간색 외관에 따뜻한 나무 느낌을 살린 인테리어가 조화롭다. 간간이 포인트를 준 핑크색이 발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정면에 자리잡은 떡. 하트, 동그라미 등 갖가지 모양을 예쁘게 낸 게 색도 곱다. 단호박 녹두 찰떡, 단호박설기, 모듬영양찰떡, 보리떡, 쑥설기, 팥구름떡에 떡 케이크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카페답게 커피, 차, 빙수 등도 함께 판매한다. 석씨는 “재료가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쌀 우리농산물을 고집하고 무색소·무방부제 건강식품을 만드는 데 공을 들입니다.”

메뉴 중에 떡와플은 뭐지? 이 집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란다. 흰 찰떡, 단호박 찰떡, 쑥찰떡 등으로 와플처럼 구웠다. 석씨는 “겉은 바삭바삭하면서 속은 쫄깃쫄깃해서 맛있어요. 몸에 좋은 찹쌀로 만들었으니 밀가루 와플과는 비교할 수 없죠.”

떡 하면 왠지 중장년층의 먹을거리라는 생각이 있다. 웬걸? 주 고객이 젊은층이란다. 석씨는 “요즘 건강을 생각하는 젊은 고객들이 많이 찾습니다. 식사대용으로 사가는 단골도 꽤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작은 공간이 바글바글 금방 메워졌다.

괜히 인기 있는 게 아니다. 그 이면엔 석씨 가족의 부지런함과 정성, 땀, 노력이 숨어 있다. 석씨 가족은 새벽 4시면 떡집으로 나란히 출근을 한다. 가장 중요한 떡 찌는 임무는 석씨 담당. 하루하루 주문량을 토대로 하루치 예상 판매량을 어림해서 만든다.

한 판 한 판 정성을 다해 떡을 쪄낸다. 떡 찌는 일은 압력 조절이 관건이다. 두툼한 떡은 상관 없는데 모양을 내는 떡은 약하게 오래 쪄야 안 부서진다. 떡 케이크의 경우 찌는 데 보통 20분이 걸린다.

항상 어려운 부분은 고객에게 시간 맞춰 떡을 전달해야 하는 일. “재료부터 장식, 포장까지 고객 맞춤형 떡을 만들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작업하는데 시간 내에 주문량을 소화해내는 게 만만치 않더라고요. 초기엔 물량을 제대로 못 맞춘 적도 꽤 있었죠.”

석씨가 떡을 찌면 아내 김성순(54)씨는 커피와 차 등의 음료를 만든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큰 딸 지현(28)씨는 떡 케이크 디자인과 전반적인 경영을, 아들 승한(22)군은 매장을 관리한다.

잡지사의 인턴으로 근무하는 둘째딸 지혜(25)씨는 고정멤버가 아니지만 언제라도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준다. 분업도 척척이다. 메뉴 개발도 가족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한다. 일이 끝나는 저녁에 다른 제품들을 깐깐하게 시식, 품평을 하며 회의하고 아이디어를 낸다.

찹쌀로 만든 떡 와플.

지역자활센터가 이어준 떡과의 인연

기계를 다루던 투박한 손으로 떡을 만들지 상상이나 했을까. 석씨는 울산 SK에너지에서 계측제어 분야 기술자로 20여 년간 근무했다. 1987년 IMF 때 명예퇴직 했다. 당시 6000만 원의 연봉, 대우가 좋아 집도 일찌감치 마련해 놨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명예퇴직금도 1억원이 넘어 별다른 노후 걱정 없이 회사를 나왔다. 게다가 혼례원을 운영하던 아내가 있어 든든하기도 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혼례원이 잘 나가다 보니 욕심이 나더라.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건물 부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게 된 것. 집도, 상가도 차압당하면서 전 재산을 잃고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때 상실감을 넘어 공포감은 더욱 커진다.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어 보이던 절망의 나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다.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자리가 많을 것이란 생각에 울산 토박이인 석씨 가족은 2006년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딱히 돌파구는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하 단칸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지역자활센터가 석씨와 가족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역자활센터는 근로 능력이 있는 저소득층 주민에게 다양한 직업 교육과 창업 교육 등을 제공하는 자활 지원 서비스다. 석씨는 떡을 잠깐 다뤄봤던 혼례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강남구 자활센터에서 떡 사업 과정을 수료했다.

떡 만드는 법을 배웠더라도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서울, 대구, 부산 등 잘 하기로 소문난 떡집은 다 찾아다니며 떡을 배웠다. “떡이 한약과 같더라고요. 어느 한의사 밑에서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떡도 장인에게 배워야 제대로 기술을 익힐 수 있어요. 하루아침에 잘 빚어낼 수도 없고 3년 정도는 미쳐서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기술을 익혔으니 다음은 작은 떡집을 차릴 차례. 하지만 자금이 없었다. 여러 궁리 끝에 저소득층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서울시 희망드림뱅크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희망드림뱅크는 사업계획서와 함께 자금지원 신청을 하면 철저한 심사 후 연 2% 고정금리로 최대 2000만원까지 대출해 준다.

마침 석씨 가족의 사업계획서가 최종 선정돼 꿈을 이루게 됐다. 그렇게 해서 석씨는 가족과 함께 대출자금으로 지난해 1월 떡찌니를 열었다.

“처음 떡 카페를 시작할 때는 떡을 포장할 변변한 포장지 하나가 없었어요. 우리 상호가 박힌 걸 대량으로 맞추려면 100만원 정도는 드는데 정말 쌀을 살 돈도 없었거든요. 동네 슈퍼마켓에서 봉지를 얻어 가지고 와 포장해 주곤 했죠. 전단지나 명함 내는 건 꿈도 못 꾸는 일이었습니다. 영차~ 영차~ 열심히 땀을 내보니 돈이 모이기 시작하더군요. 8개월쯤 지나서 떡찌니 로고가 새겨진 반듯한 포장박스를 갖추게 됐답니다.”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석씨의 얼굴에서 그간의 고생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걸음씩 천천히 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금전적으로도 보상은 있었을까. 오픈한 지 1년 8개월여. 한 달 매출은 2000만 원이다.

먹고 살기엔 괜찮다고 할 수 있지만 지난해까지 여기저기 채무를 다 갚은 상태라 아직은 좀 더 벌어야 된단다. 사실 떡집의 비수기는 요즘 같은 여름이다. 그래서 개발한 계절 메뉴가 팥빙수. 5000~6000원 가격대로 떡집의 강점을 내세워 쫄깃쫄깃한 떡을 풍성하게 올려 판매, 지난 여름 매출을 올리는 데 쏠쏠한 역할을 했다.

떡집이란 게 재료부터 제조 과정이나 보관까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터. 지현씨는 재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떡은 특히 재료가 가장 중요해요. 안 좋은 것을 쓰면 손님들은 단번에 알아 차려요.”

‘떡찌니’ 내부 전경(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소외계층 돕기 새끼치는 나눔

석씨가 흐뭇하게 지현씨를 바라본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운도 따르는 것 같아요. 몇 억을 투자해서 초밥집, 공장을 차려도 다 잘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가느냐에 달렸어요. 제 아이들이 만약 넘어지더라도 손을 바로 내밀진 않을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오뚝이처럼 일어나야죠. 그게 제가 바라는 것이고 또 그러리라 믿어요.”

석씨 가족은 떡찌니 시작과 함께 소외계층 돕기에도 나서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떡을 나눠주고 서울시로부터 인건비를 지원받아 장애인, 고령자 등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줬다. 또 떡집을 운영하기 원하는 저소득층에게 교육도 시킨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도움 받았던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서란다. 모든 게 쓰라린 아픔을 겪어봤기에 가능하리라.

석씨에게 앞으로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상대로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저 나눔을 베풀면서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겁니다.”

내외가 참 부창부수다. 성순씨가 바리바리 떡을 싸서 인터뷰를 마치고 가려는 기자 손에 한아름 쥐어준다. 옆에 있던 승한군이 웃는다. “어머니의 즐거움이 뭔지 아세요? 크든 작든 뭐든 나눠주시는 거예요.”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