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는 그림을 향한 에너지가 넘쳤다. 사람이 한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는데 이때가 그러한 시기였었다. 그래서 그림 작업에 대한 애착이 더 강렬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종종 그 힘든 터널을 지나온 것은 ‘그림이 나를 살려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힘든 산행을 다녀오면서 가로수 길을 걸었다. 어둠내리는 거리, 저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로수 잎들에 부서진다. 날은 어두워지고 긴 침묵처럼 일렬로 서 있는 가로수 길은 인상적인 풍경을 선사하면서 왠지 모를 평안함을 선사했다.
양귀비는 치명적으로 예쁜 꽃이다. 그 매력에는 도망 갈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귀비의 혼(魂)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솔직히 미친 듯이 빠져들어 그리고 싶었던 꽃이 양귀비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반된 모순의 감정을 생각하며 스스로 얼마나 욕심이 많고 집착했던가를 떠올리며 빙긋이 웃음 지을 때도 있다.
모란꽃 작품은 훗날 ‘일월도’연작의 원초적 영감을 선사했던 작품이다. 굉장히 풍부한 모란꽃을 그리면서 접하게 된 것이 민화(民畵)였기 때문이다. 색감도 환상적인 농자색(濃紫色)인데 부귀와 영화라는 꽃말이 더욱 좋아 빠져들었다.
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kdc@econov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