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중년 남성은 무엇이었나. 답답하면 꼰대, 도를 넘으면 개저씨, 아니면 그냥 ‘아저씨'. 사실 ‘불혹’ 이라는 수식어로 (실수와 실패는 젊음이 아니면 무능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능력과 지위를 그들에게 강요한 건 아닐까.

‘반 백 년’ 살았으니 지갑은 가볍게, 입은 무겁게 할 것을 미덕으로 밀어붙이며 침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쉼표가 허용되지 않는 세대. 그들은 아버지이자 부장님, 노부모의 아들,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연결고리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채 그저 꼰대라 불릴까 눈치를 보는 아저씨들이었다.

그러다 의외의 무리가 나타났다. 바로 ‘아재’다. X세대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꾸미고, 위하는 소비를 하는 데 거침이 없다. 야유회용 등산복이나 회색빛 양복은 거부한다. 성형외과 시술은 물론 개성을 중시하는 여가생활을 향유하는 등 아저씨를 벗어났다. 꼰대도 사양이다. 젊은 세대와 아재개그 코드로 유머러스하게 소통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아재들, 불혹과 반 백 년의 책임감에서 자유로운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아재개그’ 세대소통 하는 전 연령층 유머코드 넘어 리더십 필수조건·광고까지 진출

무대에 늘어난 런닝을 입은 한 사내가 나온다. 이른바 ‘아재악령’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킨 그는 말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애들이 먹는 거 아냐, 나는 ‘어른스’ 아메리카노 먹어야겠네.” 객석에서 야유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소리가 커진다.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아재씨’의 한 대목이다. 아재현상이 문화 전반에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아재개그의 힘이 있다. 썰렁하지만 곱씹을수록 피식 웃게 만드는 짧은 유머가 전 세대를 아우른 것.

아재개그는 꼰대와 아재의 경계를 허물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게 한다. 김대한(32, 양천구) 씨는 “최근 아재개그가 유행하며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과 차장님이 아재개그 대결을 하시더라. 분위기가 편안해지고 재밌어서 좋았다.” 장석우(45, 종로구) 씨는 “딸한테 문자 할 때 쓰고, 비즈니스 관계에서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 쓰려고 재미있는 아재개그를 보면 메모해놓는다”고 말했다.

아재개그는 단순하고 뻔한 말장난이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어 구사하는 이의 이미지를 친근하고 편안하게 바꿔놓는다. “조기는 축구할 때 먹어야 제 맛이다. 조기축구.” 배우 차승원은 TV프로그램 <삼시세끼>서 아재개그를 선보이며 친근한 아재의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럭셔리한 탑배우의 이미지가 어촌에 쪼그려 앉아 낀 고무장갑과 아재개그 한방으로 푸근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재 개그는 정치인에게 ‘이미지 전환’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안철수 의원은 야권연대에 대해 묻는 질문에 “자꾸 연대 이야기만 하시면 고대 분들이 섭섭해 한다”고 말해 언론에 여러 번 회자됐다. 정청래 전 의원은 지난해 10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나는 좌파다’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리며 왼손에 파를 든 사진을 첨부해 400건이 넘게 리트윗됐다.

▲ 버거킹 광고 캡쳐.

상업 광고에도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수트를 잘 차려입은 배우 이정재가 차 뒷좌석에 앉아 “세우! 세우라고!!”라며 다급히 소리치자, 급정거한 차량 앞으로 ‘새우’들이 건너간다. 버거킹 ‘통새우 와퍼’ 광고다. 이 광고는 공개 일주일 만에 22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또 모바일 게임 ‘블라썸 블라스트 사가’ 광고에는 중년 배우 우현이 꽃 분장을 하고 “나 블라썸(불렀어)?”이라고 묻는다. 롯데렌터카는 TV프로그램 <SNL>에서 ‘아재셜록’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신동엽을 모델로 기용해 고객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신 차장’을 광고 전면에 내세웠다. ‘신 차장’은 롯데렌터카가 내놓은 ‘신차 장기 렌터카’의 줄임말이다. 기아자동차는 경차 모닝을 광고하는 온라인 영상을 통해 영어자막을 잘못 해석하는 아재개그로 인기를 얻었다. Good morning은 ‘좋은 모닝을 가졌다’ Good bye는 ‘잘 구매했다’ 등으로 번역하는 식이다.

HS애드 경영정보팀 김성호 부장은 “아재개그는 B급유머와 복고가 혼합돼 전 연령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4050세대에겐 친숙함을, 젊은 층에겐 신선함을 주는 것. 아재개그를 활용한 광고는 그냥 흘러가기보다 공유를 하거나 한 번 더 보는 등 파급력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미디어 문화연구를 하는 이성민 연구원은 “아재개그가 메인 문화코드가 된 것은 1020세대처럼 젊은 세대들은 아예 모르는 영역이라 원초적인 아재개그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져 재미를 느낀 것도 유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아재코드는 문화를 리드하는 권력층에 채용되기 유리한 측면도 있다. 문화생산자들 대부분이 40대에 집중돼 있고, 문화권력이 40~50대로 노령화돼 있다. 이들의 취향에 맞는 코드들이 취사 선택돼 아재라는 단어로 묶여져 메인 문화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넉넉한 경제력으로 ‘아재의 품격’ 유지… 밥보다 커피·성형외과 시술 늘어

▲ 출처=포시즌스 호텔 서울

요즘 아재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경향이 짙다.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가족들을 위해 일만 하고 대포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세대는 지났다. 요즘 아재들은 자기 자신에게 돈을 쓰는 데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 것.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스러운 삼겹살집, 호프집을 전전하지도 않는다. 두둑한 지갑과 지나온 연륜을 기반으로 아재의 품격에 맞는 소비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넓은 범위에서 2000년 중반에 등장한 ‘노무족’과 닿아있다. 노무족은 ‘노 모어 엉클(No more Uncle,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다)’이란 말의 약자(NOMU)다. 이들은 아저씨 또는 중년으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즐기려는 성향이 짙다. 아저씨의 상징인 뱃살과 칙칙한 정장, 권위적 이미지를 벗어던진 노무족의 가장 큰 특징은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데 열심이라는 점이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센터 자료에 의하면 올해 카드 이용자 중 ‘카페’ 결제 건당 금액이 가장 높은 세대는 40대와 50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제 금액을 가장 많이 지불한 세대는 50대로 1만1661원을 기록했다. 이어 40대(8807원), 30대, 20대 순이었다. 특히 40대 이상에서 커피 이용은 남성 비중이 더 높아 전체 이용자 중 53%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커피에 밥값을 왜 쓰나’라고 말하는 아저씨들이 아니다. 아재들은 카페를 여성들이 모여 수다를 즐기는 곳에서 중년 남성들의 새로운 커뮤니티 장소로 바꿨다. 성북구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 김 모 매니저는 “예전에는 메뉴판 앞에서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는 중년 남성들이, 이제 자신의 기호에 맞는 원두를 고르고 삼삼오오 모여 저녁 시간대에도 자주 온다”고 설명했다.

아재들이 거울을 보자 고가 그루밍 관리에 속하는 성형외과 매출이 올랐다. 나이 먹는 것을 체감하며 관리하는 아재들은 더 이상 보톡스 시술을 숨기지 않고, 피부관리나 주름제거술, 필러 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12일 아이디병원 아시안뷰티센터에 의하면 주름제거 시술을 받은 40대 남성 비율은 2012년 3%에서 2013년 10%, 2014년 16%로 꾸준히 늘었다. 같은 기간 50대 이상 남성 역시 1%, 8%, 9%로 증가해 중장년층이 주름 제거를 위해 병원을 많이 찾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보대행사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모 씨(45세)는 “처음에는 주름 때문에 보톡스만 시술했는데 나중에는 필러가 욕심나더라. 콧대에 조금 넣었더니 잘생겨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자기관리가 필수고, 내 자신도 마음에 든다”며 “예전에는 남자들이 미용실 가는 것도 부끄러워 이발소만 가지 않았나. 지금은 내 주변만 해도 고급 미용실도 많이 간다. 성형외과나 피부과도 그렇게 바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경제력을 지난 아재들의 그루밍은 성형회과 시장뿐 아니라 화장품 판매 비율도 높였다. 11번가에 따르면 전체 남성구매자 중 4050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1분기 41%까지 올라섰다. 이는 지난해 1분기 36%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다. 포시즌스 호텔 광화문은 남성사우나에 그루밍족을 위한 프라이빗한 파우더룸을 8곳이나 설치했다. 또 지난 3월 영국식 정통 면도 서비스에 맞춤형 헤어스타일을 제안하는 남성 전용 이발소 ‘헤아(HERR)’를 입점시켜 꾸미는 아재들의 입맛을 맞췄다.

트렌드 전략 마케터 최의진 더 블랭크 대표는 “남성들은 비교적 남에게 비춰지는 것이 여성에 비해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러나는 것이 자기표현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풍토에 중년들도 합류한 것이다. 팀원들과 함께하는 생활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남성들의 심미적 모습이 중요해졌고 자신들도 동년배의 겉모습을 유심히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기를 꾸민다고 아재들이 모두 미남은 아니다. 아재들은 미남을 기준으로 꾸미지 않는다. 아재들의 그루밍 열풍은 2012년 방영된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과 맥락을 같이한다. 2030세대처럼 트렌디하면서도 경제력까지 갖춘 골드 40대를 보여준 이 드라마는 ‘꽃중년’ 열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아재파탈’은 미남이 아니어도 된다. 쉽게 말하면 수트를 입은 장동건보다 청바지에 검은티를 멋들어지게 입은 조진웅이 각광받는 것이다. ‘대세 아재’로 대표되는 배우들은 대개 남성미와 능력, 편안함 그리고 비교적 젊은 스타일 감각과 마인드를 갖췄다. H매체 연예부 기자는 “지금 아재는 단연 배우 조진웅이 대표적이고, 마동석, 박성웅, 황정민, 성동일 등도 아우를 수 있다. 오히려 외모가 강조된 미남배우는 아재파탈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 [TIP BOX] 부장님 회식 걱정 덜어주는 ‘아재개그 모음’

바람이 귀엽게 불면? 분당!
신사가 자기소개하면? 신사임당
들깨를 먹으면 술이 들깨
피아노를 던지면 어떻게 피아노
오이가 무를 때리면? 오이무침
간디가 어딜 간디
동생이 형을 좋아하면? 형광펜
아몬드가 죽으면? 다이아몬드
왕이 넘어지면? 킹콩
육회 먹으면 유쾌, 죽 엎으면 전복죽
우리가 사이다를 먹는 그런 사이다
가다의 반댓말은 노가다
설운도가 옷을 벗는 순서는? 상하의~상하의~
서울이 추우면? 서울시립대
왕이 궁에 가기 싫을 땐? 궁시렁궁시렁
소나무가 삐지면? 칫솔 
반성문을 영어로하면? 글로벌 
'소가서울간다'를 세글자로 줄이면? 소설가 
맥주가 죽기전에 남긴말은? 유언비어 
아마존에는 누가살까? 아마...존(Jojn)?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딸기시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