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의 반이 지났고, 도처에서 유의미한 수치들이 발표되고 있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은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이어 출간되자마자 1위에 오른 이 에세이는 온전한 나를 찾고 내면에 집중하자는 메시지로 독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미움 받을 용기>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처럼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은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출판계의 히트 아이템이다. 이는 그만큼 마음의 병을 얻은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음의 병은 치유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다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찾기도 하니 영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새로운 것에 지나친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생활의 발견’으로도 충분하다.

 

#1 여유 한 잔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커피를 마시는 장소도 많아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식은 커피는 오가는 대화 속에 묻혀 보이지를 않는다. 끝없는 수다와 디저트에 곁들여 마시는 커피가 너무 많아진 탓일까. 문득 온전한 커피 한 잔의 여운이 그립다. 그렇게 찾아가는 곳 중의 하나가 홍대 근처에 있는 커피랩이다. 이곳은 세계 바리스타 대회 챔피언 출신이 운영하는 말 그대로 ‘커피 실험실’이다. 온갖 종류의 커피로 가득 찬 두툼한 메뉴판에는 다양한 원산지의 커피는 물론 실험실에서 만든 만큼 독특하고 기발한 커피도 많이 보인다. 그중 하나인 ‘매드 사이언티스트 블랜드 아이스 라떼’는 르완다 원두를 베이스로 여러 원산지의 커피를 섞어서 만든 대표작이다. 뜨겁고 쓴 에스프레소와 차갑고 달콤한 깔루아로 두 개의 층을 만든 ‘극단적 대비’나 설탕, 럼, 에스프레소와 커피랩의 특제 시럽을 넣어 맛이 다른 네 개의 층으로 만든 ‘사나이 커피’는 한 번에 입속에 털어 넣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커피 칵테일이다. 맥주에 에스프레소를 섞어 만든 카페 콘 비라(Caffe Con Birra), 아이스크림과 베일리스로 달달한 맛을 낸 카페 스노 탑(Caffe Snow Top)도 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를 갖기에는 손색이 없다.

 

#2 동화 효과

출처=캔들윅북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때아닌 충격에 휩싸이곤 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어른도 까마득한 그 옛날의 아이로 돌아가 있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몽롱해지는데, 이 방면으로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최고다. 어려서 영화 <킹콩>을 아주 감명 깊게 본 그는 책에 고릴라나 침팬지를 자주 등장시킨다. <기분이 어때?>는 풀이 죽은 침팬지에게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을 한다. 침팬지는 장난감이고 뭐고 다 싫을 만큼 재미없다가, 폴짝폴짝 뛰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로 뭐든지 궁금하다며 다양한 상황에서 느끼는 온갖 감정을 거침없이 말한다. 앤서니 브라운은 지극히 평범하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아빠도 아이 눈에는 전지전능한 슈퍼맨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집안일이나 하는 엄마가 아주 중요한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아주 중요한 학교에 다니는 아들보다 훨씬 더 존재감 있다는 사실을 짧지만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이렇듯 동화책 한 권이 소설 몇십 권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건 아마도 그 안에 과거의 내가 있기 때문이리라.

 

#3 닮은 와인 찾기

좋은 와인은 미소로 시작해서 미소로 끝난다고 했다. 그리고 좋은 와인일수록 대체로 비싸다. 다만 좋은 와인의 스토리에 부단히 귀 기울이다 보면 닮은 와인을 대형마트에서 찾아 마시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호주 국가대표로 불리는 펜폴즈 그랑주(Penfolds Grange)는 한 병에 150만원이 넘는다. 호주를 대표하는 품종인 시라즈(Shiraz)로 만드는데, 특유의 강건함과 묵직한 보디감, 다양한 아로마 향은 물론 오래도록 남는 여운까지 레드 와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꼿꼿한 절개를 지닌 선비 같으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귀족의 느낌? 그런가 하면 호주 바로사밸리에서 생산되는 글레쳐(Glaetzer)는 펜폴즈 그랑주와 같은 시라즈 품종으로 만들었다. 펜폴즈에 비해 강건함과 여운이 조금 떨어지지만 그랑주의 먼 친척이라 할 만큼 비슷한 질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4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가격 덕에 부담은 크게 덜 수 있다. 샤토 뒤 테르트르 로트뵈프(Château du Tertre Roteboeuf)는 프랑스 생테밀리옹 지역의 개라지 와인(Garage Wine)으로 유명하다. ‘언덕 위의 트림하는 소’라는 뜻을 지닌 이 내추럴 와인의 대명사는 가격이 80만원에 육박한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생산자인 프랑수와 미짜빌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보르도의 코트 드 부르그 지역에서 록 데 캉베(Roc de Cambes)라는 보르도 그랑 크뤼 급의 와인도 생산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떼루아가 그대로 반영된 놀라운 맛을 선사하는 이 와인은 그 질감과 가치가 샤토 뒤 테르트르 로트뵈프만큼 준수하지만 가격은 8~15만원대로 무척 저렴한 편이다.

 

#4 미지의 여행

▲ 출처=크리스탈 크루즈

보다 럭셔리한 호텔과 항공기의 퍼스트 클래스, 개인 맞춤형 식단 등등. 이런 게 우리가 원했던 럭셔리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어떤 ‘가치’를 얻고 싶은 욕구가 럭셔리한 경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여행을 통해 가치라는 걸 느낄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여행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관광 코스와 패키지 여행 상품은 10년 전과 크게 다를 게 없고, 호텔이나 기내 서비스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여행 수요에 비하면 업로드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 크루즈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미지의 여행으로 남아있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선상 리조트인 크루즈는 여행과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꿈의 여행으로 통한다. 여행의 주를 이루는 숙박, 레저, 엔터테인먼트, 쇼핑, 쇼, 음식 등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동 수단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노인’과 ‘바다’가 있다. 머리를 한 대 내리치는 듯한 노장의 훈수나 바다가 알려주는 끝없이 넓은 세상은 크루즈 여행만의 값진 경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