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의 위기> 원톄쥔 지음, 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중국에서 이런 주장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중국 현대사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1949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이 겪은 8차례의 위기를 집중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이를 토대로 중국의 발전방향에 대해 혁신적인 논의를 펼친다. 그의 주장은 서구의 발전경로는 현대화와 도시화로 대표되는데, 중국의 발전방향은 그렇게는 설명되지 않는 특징과 메커니즘을 지녔으므로, 중국은 결코 서구의 뒤만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195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향은 ‘극좌’가 아니라 ‘친자본’이자 ‘우파’의 노선이었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을 때 중국에는 분배는커녕 기본적인 생산수단이나 사회적 인프라 같은 ‘기초자본’이 전혀 없었다.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소련의 설비와 외자를 도입(제1차 외자 도입)하여 공업화를 추구하는데, 이를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뤄졌다. 총동원체제와 대약진운동은 자본을 만들기 위한 노동력 대중 동원이었다. 따라서 대약진운동은 극좌적 오류가 아니라 자본 형성을 위한 농민 동원, 공업화와 자본 축적의 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배경에는 정책실패로 인한 대규모 실업난이 있다. 학생·지식인의 농촌행을 말하는 상산하향(上山下鄕)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에 미국과 서방이 중국을 봉쇄하자 중국 지도부는 서둘러 핵무기를 개발했다. 또한, 전쟁에 대비해 연해 지역의 공업화 설비를 내륙으로 옮기는 ‘삼선(三線)건설’에 착수했다. 하지만 산업적 고려 없이 공업화 설비를 무리하게 옮기면서 공업이 분산되자 효율은 급감했고, 실업이 급증했다. 당시 도시에는 청년 실업자 수가 수천만 명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문혁이라는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여 도시 경제가 수용할 수 없는 실업자들을 농촌으로 내려 보냈다. 홍위병 운동은 높은 실업률에 좌절한 젊은이들의 왜곡된 정치적 저항이자 시위였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이 등장하고,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것도 경제위기의 결과였다.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잠시 후계자에 올랐다가 덩샤오핑 중심의 실용주의 세력으로 권력이 교체된다. 중국공산당 2세대의 등장이다. 1970년대 말 경제위기 국면에서 중국은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문사건의 배후에는 1980년대의 누적된 경제적 모순이 자리한다. 당시 대외개방을 통해 외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는 농촌과 국유기업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물가 폭등으로 나타났다.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가 조정에 나서자 시장이 얼어붙었다. 1988년과 1989년의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천안문사건은 당시의 경제 위기에서 파생된 상황이었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발했을 때 위기가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거대한 향촌(농촌)사회 덕분이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수천만 명의 농민공들에게는 되돌아갈 농촌공동체가 있었던 것이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노동력과 자본의 거대한 저수지인 향촌사회가 위기를 연착륙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당시 친민생 정책의 일환으로 향촌사회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소비 여력이 죽지 않았고 이 소비수요가 위기를 완충하고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지금 중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삼농(三農)문제’다. 삼농이란 농업, 농촌, 농민을 말한다. 중국의 향촌사회는 중국을 떠받드는 거대한 안전판이기 때문에 향촌사회를 파괴해선 안 된다. 산업자본이 집중된 거대 도시를 계속 만들기보다는 현급의 작은 도시를 통한 경제 발전 즉 성진화(城鎭化)를 추구해야 한다. 대규모 농장 농업이 아닌 농민의 생존이 보장되는 소농경제를 육성해야 한다. 중국의 발전 경로는 종국적으로 생태문명에 기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