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인프라는 나라의 혈관이다.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몇몇 사업자는 혈관을 빌려주고 통행료를 받는다. 통신사는 조단위 투자를 집행만 만큼 안정적인 수익을 거둬들인다. 과점 시장이니 평온할 것만 같다.

실상은 다르다. 조용한 날은 오히려 드물다. 가입자 유치 경쟁은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신사업 선점 레이스도 요란하다. 정부발(發) 규제 이슈는 분란을 낳는다. 현장에서 암암리에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은 언제나 무성하다. 어쩌면 일상적인 장면들이다.

소비자 마음은 떠난지 오래다. 정부·업계를 한통속으로 여긴다. 실망과 불만이 뒤섞여 아예 기대를 저버린 이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일까. 기대가 사라지니 마치 불만의 총량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착시 현상이다. 국면 전환의 단초가 간혹 엿보이기도 하지만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지난 24일 강남역. 소비자단체 컨슈머워치가 캠페인을 벌였다. 소비자 힘으로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을 폐지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시행 1년 9개월째인 법안을 벌써 폐기하자는 주장이다.

▲ 출처=컨슈머워치

컨슈머워치는 정치권에 3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단통법을 폐지하라. 둘째, 휴대폰 할인을 막지 마라. 셋째, 통신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라. 사실 전부터 많이 나오던 의견들이라 새로울 것은 없다.

‘지원금 상한제를 폐지하자.’ 최근 업계에서 자주 들리는 얘기다. 단통법 핵심 조항인 상한제를 폐지해 부정적인 효과를 줄이자는 주장이다. 컨슈머워치는 상한제 폐지만으로 한계가 있다고 했다. 단통법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선 상한제라도 폐지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전국이동통신유통협회는 지난 27일 성명서를 냈다. 상한제 폐지를 촉구했다. 일부에선 이 조항이 폐지되면 휴대폰 출고가나 요금이 오를 것이라고 말하는데 협회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했다.

“소비자들이 단통법에 불만을 갖고 있는 이유는 휴대폰를 비싸게 구입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지원금 상한제가 존재하고 있다. 지원금 상한제가 폐지되면 이동통신사 간의 이용자 후생 경쟁이 다시 촉발될 것이다.” 성명서에 담긴 내용이다.

상한제의 운명이 판가름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했다. 28일 시작되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방위) 전체회의에서 그 앞날이 뚜렷해질 것으로 보였다. 28일 미래창조과학부가 첫 업무보고를 했다.

윤곽이 뚜렷해지지는 않았다. 최양희 미래부 장관은 소신을 밝히지 않았다. 이 사안은 방송통신위원회 소관이라며 한발짝 물러났다. 다만 방통위와 협의할 부분이 있다면 하겠다고 했다. 방통위 업무보고는 오는 29일 진행된다.

미방위원들은 미래부에 입장을 명확히 하라고 소리쳤다. 미래부 답변은 두루뭉술했다. “가계 통신비 전체의 부담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개선돼야 한다는 것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수단이 무엇인가는 정부가 여러 정책을 강화하거나 의견을 들어 개선하도록 하겠다.” 최 장관의 말이다.

미래부가 손을 놓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최근 지원금 비례원칙을 수정해 저가 요금제에서도 현재보다 많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로 했다. 고시 개정안은 행정 예고와 규제개혁위원회 심사를 거쳐 빠르면 다음 달부터 실시될 전망이다.

단통법 관련 논의는 1년 9개월째 돌고 도는 중이다.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를 둘러싼 풍경 역시 마찬가지다. 실적 시즌이 다가오면서 통신사들이 유통업계에 고액 리베이트를 지원해 불법 지원금을 조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2014년이나 2016년이나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단통법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이다.

단통법 문제만 골칫덩어리인 건 아니다. 다른 갈등도 여전하다. 대표적으로 CJ헬로비전은 둘러싼 이슈가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SK텔레콤은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린 탓일까. 공정위는 6개월째 기업결합 여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조건부 승인’이 업계 중론이기는 하다. 그런데 최종 판단이 이뤄지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승인 이후 미래부와 방통위 심사도 받아야 하는 탓이다. 만약에 최종 판단이 통합방송법 제정 이후가 된다면 사안은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LG유플러스는 방통위 단독 조사 거부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달 초 LG유플러스는 방통위 전격 조사가 시작되자 자료 제출을 거부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결국 방통위는 이 사태를 별건으로 정해 조사 본건에 앞서 처리하기로 했다. 이례적인 조치다.

한편 28일에는 휴대폰 할부이자를 통신사가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 4년간 할부이자는 총 1조 원대에 이른다고 신용현 미방위원은 설명했다. 원래는 통신사가 내야 하는 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말했다. “국민을 기만해 이득을 취한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단순히 퇴보·퇴행·쇠퇴라고 말하긴 어렵다. 위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통신업계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던 풍경들인 탓이다. 매번 사안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본질은 제자리걸음이다. 논란은 다른 논란의 등장으로 잊히는 양상이다. 통신 소비자 다수가 부정과 비관의 정서를 갖게 된 배경이다.